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걸음씩 Dec 16. 2024

상사와는 적당한 거리두기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내가 회사에서 해고의 염려를 깨끗이 씻게 된 것은 두 사람의 퇴사사건 이후다.

가장 직급이 높은 소현이 먼저 퇴사를 했다.

소현은 회사의 창단멤버로 창립당시 이미 10년 이상 경력을 갖고 있던 배테랑이었다.

반면 대표는 해당분야 경험이 별로 없는 초짜였으므로 소현를 많이 의지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되었으니 대표도 더이상 소현을 의지하지 않고, 소현은 익숙한 이 환경에 스며들어 집인지 직장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헤어드라이어와 고데기를 들고 출근하여 머리를 만지는 것은 부지기 수고, 머리감고 머리수건을 뒤집어 쓴채 출근한적도 있었다.

퇴사하기 몇달전부터는 막달이 된 임산부처럼 졸음을 참지 못하고 줄곧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잤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고 모니터 한쪽 구석엔 영화나 드라마 화면을 띄워놓고 일을 했다.

소현의 모습을 대표도 여러번 봤지만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소현은 평소에는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잘 지내다가도 업무에 대해 질문을 하면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권위를 내세우며 면박을 주어 다중인격 같은 모습을 보였다.

업무의 연관성이 없었더라면, 소현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이기적으로 일했을지도 모를 나에게, 물어봐야만 하는 환경은 훈련이었다.

살림이나 육아에 대해서 나에게 물으면 조언을 해주다가도 업무모드가 되면 납작 엎드려 소현의 기분을 살펴가며 질문을 해야 하는 아수라백작 같은 두가지 삶이 매일 반복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소현이 차라리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그녀에게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업무에 익숙해져서 소현의 도움 없이도 일처리를 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만 소현이 불편한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나영도, 심지어 대표도 소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는 가끔 소현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나영과 나에게 맥주 한잔 하고 가라며 불러서 소현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도 했다.

직원에게 다른 직원 험담하는것이 대표로서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소현에 대해 나도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대표의 뒷담화에 말을 보탰다.



그날은 소현의 키보드 소리가 유난히 크고 거슬렸다.

평소에서 소현은 키보드를 세게 내리쳐서 팔목 통증을 호소했고, 그럴때는 키보드를 세게 쳐서 그런거 아니겠냐고 말을 했으나 습관이 고쳐지지 않았다.

대표는 그날따라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는데 그동안 지적하지 않았던 키보드 소리에 대해 언성을 높이며 잔소리를 했다.

소현은 대표와 심하게 말다툼 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 당시 그렇게까지 갈 상황이 아니었는데 아마도 그동안 둘다 서로 쌓인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소현의 후임을 구하기까지 대표가 애를 먹었다.

중간 관리자를 구하는 것은 나 같은 말단을 구하기보다 훨씬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건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가 보다.

대표가 마음고생을 충분히 하고 난 후 지금의 부장이 오게 된 것이다.

부장과 함께 일하는 것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나영이 사표를 제출했다.

나영의 퇴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나영의 후임을 구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왔다가 며칠 일하고 가기도 하고, 한두 달 후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사업을 시작한 후 이렇게 직원 때문에 고생하기는 처음이라는 대표는 그동안 폭삭 늙었다.

힘들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일을 겪고 나니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직원이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최근에 겪은 구인난은 그야말로 대표에게는 복병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사무실은 뭔가 불안정한 분위기다.

그러니 내가 치명적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대표는 나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게 생겼다.

물론 해고를 해도 크게 충격이 될 것 같지 않다.

몇 달 후면 정년퇴직의 나이고 요즘은 정년퇴직 이후 중년들의 일자리를 위한 지자체의 프로젝트가 꽤 많은 것으로 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제2의 인생을 위해 뭔가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에 해고된다면...이라는 가설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일이고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받는 것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소현의 퇴사는 대표에게 앓던 이를 빼는 작업이었다면 나영의 퇴사는 오른팔을 잃는 충격으로 보였다.

나영이 퇴사할 무렵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고 그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나영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직원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의 수를 열어 놓고 나영이 원한다면 다 맞춰주겠다는 식의 대표 모습은 남은 나와 새로 온 부장에게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러면 그렇지...' 라며 예전의 모습을 떠올렸고,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며 요동했다.

대표는 정말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이다.


언젠가 대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모임이 점점 없어져서 지금은 만나는 모임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한마디 했다.


"그 모임은 아마 지금도 건재할걸요. 모임이 없어지지는 않더라고요."


늙을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대표는 입을 닫지 못해서 사람들이 떠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해도 대표와 같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내돈 주고 사먹기에 부담가는 고급요리라면 꾹 참고 이야기 들어주자 하며 가겠지만 대표는 삼겹살집과 같은 서민적인 식당으로 간다.

그나마 양도 푸짐하지 않아서 눈치를 보게 된다.

술은 억지로 먹이고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말만 하는 회식 분위기...어떤가?

우리는 대표가 술마시고 속풀이 하고 싶을때 회식을 하는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회식을 하자고 해도 차일피일 미루고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표가 안뒤로 회식이 없어졌다.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