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않은 편지 1
오빠, 축하해, 하늘만큼 땅만큼. 벌써 할아버지가 됐네. 나도 할머니가 되고 싶었는데, 오빠가 한발 빨랐어. 오빠, 좋지. 정말 좋겠다. 내가 이렇게 좋은데 오빠는 얼마나 좋을까.
축하가 좀 늦었지. 오빠가 너무 멀리 있어서 그래. 가볼 수도 없고 전화도 할 수 없고, 그래서 편지라도 써보는 거야. 문득 편지를 받지 못해도 마음만큼은 전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작은 홀씨가 바람 타고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 어딘가에 도달하잖아. 수신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더라도 나는 구애받지 않고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어. 어떤 식으로든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라는, 나의 믿음도 한몫한 것 같아.
오빠 그거 알아, 오빠가 언니였으면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난 종종 오빠를 언니로 착각했다는 거. 맨날 내가 오빠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놀았잖아. 오빠가 날 귀찮아하지 않아서 나는 귀찮아할 수도 있다는 걸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아. 온종일 밖에서 딱지치기, 자치기, 사방치기, 술래잡이하며 놀았잖아. 난 집에 들어오기 전 낮에 구슬치기해서 딴 것들은 비밀장소에 파묻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부딪힐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고 하나도 같은 게 없고 예뻐 내겐 보물이었어. 대부분 오빠가 딴 것들이었는데 내가 구경값, 응원값으로 얻은 구슬이 밤새 잘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들어왔지.
오빠랑 난 나이는 한 살, 결혼도 한 해 차이인데 아들은 같은 해 낳았지. 오빠하고 나는 나란히 나란히였어. 그런데 애들이 크면서 오빠가 준이랑 우리 집 훈이를 비교하더라고. 난 오빠가 왜 그러나 싶었어. 동갑내기 사내아이라 고만고만한데, 도토리 키재기인데, 비교해 봤자 별 다를 것도 없는데. 난 오빠가 지방대학 나온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했어. 자기 자식만큼은 좋은 대학 가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오빠의 기대가 잔소리를 넘어 강요가 된 게 아닐까,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내 생각은 그랬어. 준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자꾸 엇나간다는 말을 들어도 난 다 한때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어. 오빠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힘들어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헤어리지 못하고. 내가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것도 있었겠지만 오빠도 일일이 말하지는 못했던 것도 있었겠지. 자식을 흉보는 것 같고, 자식을 욕하는 것 같았을 테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더라고. 이제 와서 뒤늦게, 그때 오빠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던 게 미안한 거 있지. 훈이랑 준이가 동갑이라서 그런 거겠지라고만 여겼더랬어, 그때는. 비교하는 게 싫어서 오빠의 마음을 읽지 못했던 것 같아. 단지 준이하고 관계가 힘들고 버겁다는 하소연이었던 건데. 오빠는 내가 편해서 한 푸념이었던 건데. 우리 훈이가 무탈하게 명문대에 턱 하니 붙은 걸 부러워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 나는 나한테 생긴 좋은 일은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거든. 없는 살림에 쪼들렸고 훈이아빠 공부가 길어지다 보니 훈이한테 제대로 사교육을 시키지 못했는데 알아서 잘해주니 졸지에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힘이 들어갔던 거야. 훈이는 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하는 존재였어.
준이가 고등학교 자퇴했을 때 오빠랑 새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는 내 심정 몰라, 그렇게 말할 때도 나는 내가 모르긴 뭘 모르느냐, 고 반문했던 게 기억나. 준이가 우리 집 장손이라 기대가 컸지. 기대란 것은 기대한 사람의 몫이라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탓할 수는 없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자기 발등 찧는 일을 하곤 하잖아. 오빠 부부가 맞벌이를 해 엄마가 준이를 키웠기 때문에 조부모의 기대 또한 오빠를 통해 준이한테 흘러갔겠지. 그 기대란 게 공부나 학벌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빠가 공부에 대한 압박을 좀 자제했더라면 어땠을까. 준이가 아빠 보란 듯이 반항했던 거라고 봐, 오빠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힘 겨루는 사춘기 때, 아버지가 아들한테 져줘야 자식이 살아나는 것 같아. 이제 준이는 아빠를 뛰어넘은 것 같아. 가장이 되고 아버지가 되면서 단단해졌어. 볼수록 준이는 성격이나 생김새가 오빠를 쏙 빼닮았어. 그래서 준이도 인물 값하느라 연애도 잘한 거겠지! 너, 또...... 오빠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아 그때가 좋았어. 티격태격하며 오빠랑 장난치던 때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 준이가 방황했던 게 오히려 사는데 밑거름이 되는 것 같아 보여. 오빠가 전화해서 준이가 정신 차리고 검정고시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지만 검정고시에 붙었다고 흥분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기억나. 그런 준이가 애아빠가 됐으니 세월 참 빠르지. 오빠, 다시 한번 축하해. 여러 번 축하하고 거듭거듭 축하한다고 말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오빠가 궁금해할 훈이 소식은 다음에 적을 게. 오늘은 맘껏 축하만 하고 싶어.
이제 그만. 오빠, 먼 그곳에서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