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지 않은 편지 4
오빠, 오늘도 비가 와. 내가 편지 쓰는 날에 비가 오는 건지, 비가 오는 날에 내가 편지를 쓰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네. 오빠가 떠날 때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려서 그런가 비가 나한테 오빠한테 편지를 쓰게끔 만드는 것 같아. 내 편지가 두서없더라도 이해해 줘. 미친 듯이 걷고 숨통이 트이면 정신이 들면서 뭐든 되든 안되든 쓰고 싶어 지더라고. 그때 오빠 생각이 났어. 만날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으니까 편지라도 써야겠단 생각이 든 거야. 오빠라면 속을 뒤집어 보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 속을 털어놓고 난 뒤 스며드는 찜찜함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런 걸 말해 말아,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 써지더라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과 생기 넘치는 꽃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아름다워. 하늘나라도 이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아는 세상이 이게 전부라 오빠가 사는 곳이 어떨지 궁금해지네. 봄은 거의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살아나는데, 사람은 한번 가면 '다시'라는 게 없네. 오빠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계속 감금되어 있다시피 했을 때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만 막상 의사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않고 말았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더라고. "더 이상 할 게 없습니다, 준비하세요" 그렇게 무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다니. 의사는 몹쓸 직업 같았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죽음이구나, 무자비한 의사의 말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구나, 4,50대 남자들의 돌연사가 많다는 기사는 봤어도 그게 오빠일 줄이랴,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릴 수가 있어, 오빠 정말 너무해.
오빠가 떠난 후, 열다섯 번째 봄이 찾아왔어.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온 민들레는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건지,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진작부터 꿈틀대고 있었다는 게 놀라워. 산 자의 심장처럼 쉼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신비스러워. 심장이 파닥파닥 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그때라야, 한순간도 자신의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어서 산자들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갖기 않는지도 모르지.
나는 훈이의 도박문제가 드러나자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견디고 버틴 생명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무탈하고 무사했고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오빠한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만큼 정리된 거고 편지 쓰면서 좀 더 다듬어지는 것 같아. 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꿈이었으면 했어. 꿈에서 깨면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랐지. 현실을 망각하고 희망회로를 숱하게 굴리곤 했는데 그럴수록 힘들어지더라.
오빠, 언제부터 훈이가 망가졌을까. 훈이 말대로라면 대학졸업 직전이라는데, 그보다 전 일지도 몰라. 그런 걸 안다 한들 시급하고 심각한 일 앞에서 의미가 없더라고. 그저 궁금할 뿐인 거지. 어려서부터 준이하고 훈이는 달랐어. 다른 게 개성이라고 좋아했었는데, 내가 훈이에 대해 놓친 게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고 자신을 탓하게 되더라고. 엄마니까, 엄마라서 그렇게 되나 봐. 그러다가도 정신 바짝 차리자, 엄마니까 ~ 해야 한다는 말에 속지 말자고. 상식과 이해의 용량을 뛰어넘는 일 앞에서 정신줄 놓으면 안 돼!
나의 슬픔은 훈이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떤 때는 낯설게 느껴진다는 거야. 미소 이면에 부채로 인한 거짓말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면 속이 터져. 도박문제가 들통나고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드러난 빚은 평화로운 일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배신감, 좌절감, 분노보다 거짓말 때문에 불신하게 된다는 게 더 무섭더라고. 겉으로 드러난 빚 이외에 숨겨진 빚이 있었고 돈줄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돈을 구할 데가 있는 우리 현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아예 치고 올라갈 바닥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어. 어쩌면 영영 회복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을 상정하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해. 스스로 바닥에 처박혀 딛고 일어서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섣불리 도와주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게 중독이더라고.
잘 큰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어. 10년 이상 마음 고생 할 만큼 해서 속이 시커멓게 타버렸어. 더 이상 속 끓이며 애쓰지 않으려고 해. 그러니까 오빠도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것처럼, 삶은 돌연하고 속절없더라. 훈이를 생각할 때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싶어. 살아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꼼짝 못 하다가도 숨 쉬고, 쓰러졌다가도 일어서고 죽을 것 같다가도 차츰차츰 무뎌지고 틈틈이 웃음도 짓고... 나 이렇게 살고 있어. 이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이렇게 되는데 도움이 된 모임이 있어. 갬아넌이라는 도박중독자가족모임(갬아넌)에 나가고 있는데 회복을 돕고자 모인 자조모임인데,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아. 불행이 불행을 위로 삼는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인생이 그런 것처럼 도박중독에도 뾰족한 답이나 치료제는 없어. 그래서 경험과 힘과 용기를 나누는 것이 도움이 돼. 오빠가 걱정할까 봐 하는 말이 아니라, 회복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찌그러져있던 희망이 펴지는 느낌이야. 훈이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과의 인연이 기운을 돋아주곤 해. 죽으란 법은 없어!
지난번 내가 부탁한 생일선물을 기억해 줘. 사랑하는 내 조카 준이하고 오빠가 좋아했던 훈이를 묶어서 잘 지켜줘. 빛으로 인도해 줘. 이건 지상에서 하늘로 보내는 내 부탁이고 명령이야, 알겠지!
어느 결에 비가 잦아들고 어둠이 밀려오고 있어. 얼른 저녁밥 지어야겠어.
고마워. 내 이야기 들어줘서. 잘 지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