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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는

by kleo

나의 시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눈을 감고 손을 휘적거렸더니 바싹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손에 잡혀요. 이 앙상한 나뭇가지는 한참 동안 꺼내지 않았나 봐요. 새벽이 긴데 눅눅하지 않아요. 저 깊은 눈 속에서도 축축해지지 못했네요. 다시 속을 뒤적거려요. 아, 낭만. 이건 꺼내지 않을게요. 이걸 꺼내면 몇 날 며칠을 굶더라고요. 다시 빙글빙글 하나를 집어요. 무지개. 이것도 다시 넣어둘게요. 비가 좀 더 내려야 해요. 이리저리 휘적휘적 만지작거리니까 그 오래된 마음도 손에 걸리적거려요. 꺼내볼까요, 아니면 다시 잘 여며둘까요? 이건 자주 만졌더니 모서리도 뭉툭해지고 반질반질해진 것 같아요. 내 시집에서 제일 익숙한 것이에요. 다른 걸 찾아볼게요. 이건 좀 납작해서 잘 예측이 안 가요. 4월. 언제 이렇게 납작해져선 손가락이 몇 번이나 유영한 후 잡혔을까요. 가라앉으면 안 되는 시간이 또 가라앉아있었네요. 이건 갈피로 꽂아둘게요. 그리고 또 내 시집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은 걸 다 꺼내서 열어볼게요. 침묵. 침묵. 침묵. 너덜거려요. 꾹꾹 눌러썼는데도 번졌어요. 그래서 매번 새로 써서 넣어뒀는데도 전부 낡았어요. 오늘은 이 오래된 나프탈렌을 한꺼번에 포개서 버릴게요. 내 시집에선 다시 쓰지 않을 거예요. 다음에 또 시집을 열 땐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버려볼게요. 이왕이면 환한 것들로만 가득 찬 시집을 남기고 싶어요. 아침 같은 단어도 채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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