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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반티카 May 17. 2024

고양이 앞에선 애써 뭘 하지 않아도

2024 21일 루나 디톡스: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함명상 에세이 #10



오늘은 이웃집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는 날이에요.

비도 오지 않고, 춥지도 않고. 해도 뜨겁지 않아서, 밖에서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날씨였어요.


이웃의 어머니가 마침 장 봐오신 것들을 정리하고 계셨어요. 오랜만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어요. 

이웃집 2층으로 올라가면, 마당에 어머니가 심으신 가지와 오이, 호박 등 볼 때마다 쑥쑥 크는 초록이들이 보여요. 그 앞에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린답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이웃의 어머니는 높은 계단을 참 잘 오르세요. 


"자, 간식으로 바나나."


 어머니는 샛노란 바나나 하나를 선물로 주시곤, 마당의 수도와 연결된 긴 호스로 1층과 2층 식물들에게도 물을 주셨어요. 마침 바나나가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아셨을까요? 며칠째 사야지, 하고 시간이 없어서 못 샀었거든요. 먹고 싶었던 게 눈앞에 나타나니까, 마법 같이 신기했어요. 


"저건 로봇이야?"

"네?"


이웃의 어머니가 보고 계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멀리, 다른 집 난간에 설치된 커다란 피규어가 보였어요. 작년에 그림 그리다 말고 저런 피규어는 얼마쯤 할까, 하고 궁금해했던 생각이 나요.


"만들었겠지?"

어머니가 물으셨어요. 


"돈 주고 샀을걸요?"

아마도, 비싼 돈을 주고요. 


"저런 걸 왜 돈 주고 사?"

"글쎄요."

각자에게 소중한 게 달라서 그런 거겠죠? 



고양이가 계단을 내려갈 때 찍은 사진.

마당 구석으로 소리 없이 들어온 고양이를 발견했어요. 종종 이 집에 놀러 오는 고양이예요. 불쑥 나타나는 고양이는 뜻하지 않은 선물처럼 큰 기쁨을 줘요. 고양이랑 있을 땐, 보이는 외관이나 조건, 상대방이 한 말이나 행동을 판단 평가하거나, 비교하면서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 하지 않잖아요. 아무 조건 없이, 조용히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면서요. 고양이 앞에선 애써 뭘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깊은 충만함을 느껴요. 


생각해 보면, 선물 받은 바나나도 내가 뭘 해서 얻은 것은 아니에요. 맛있는 건 같이 나눠 먹는 어머니의 좋은 마음에서 온 것이죠. 그림을 그릴 때 역시, 내가 그리고 있는 건 맞지만 애써 열심히 그려서 좋은 그림이 나와서 그래서 좋은 건 아니에요. 그냥, 그리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그리는 것이죠. 잘 그려지든, 아니든. 이웃이 제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마당을 내어준 것도, 제가 뭘 어떻게 해서는 아니에요. 비는 공간이 있는데, 아무도 안 쓰니까 필요한 사람과 나눠 쓰자는 이웃의 좋은 마음이 있어서죠. 


줄 간식이 없어도, 고양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맛있는 음식과 그림 그릴 마당과 같이, 필요로 했던 자원들이 내게 올 수 있다는 것. 애써 뭘 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충만합니다. 충분함과 충만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명체로 살고 있는 것 역시, 마법처럼 신기한 일이에요. 오늘은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이 여유가, 많이 감사하네요! 




뭘 더 하지 않고도 충분하고 충만함을 느꼈던 순간이 오늘 하루 중에 있었는지 찾아보세요.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 또는 존재와 함께일 때 그 느낌이 들었나요? 그에 대한 감사함이 느껴지시나요?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없는 대로, 감사했던 순간을 찾아보세요. 

애써 뭘 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충만한 오늘 밤 보내시기 바라요 :)




+

그림을 그리고 집에 가는 길, 낮잠 자는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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