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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반티카 May 19. 2024

목욕보다 시원한 선샤워

2024 21일 루나 디톡스: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함명상 에세이 #12



눈꺼풀이 무거워요. 어제도 그랬는데. 몸이 안 좋은 건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날이 더워져서 그런 것 같아요. 몸도 여름을 준비하는 거겠죠. 


집 청소에, 쌀 씻기, 밥 하기 등등. 잡다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 오후가 되어서야 밖에 나왔어요. 일요일 산책은 언제나 좋아요. 주말에 수업을 할 땐, 수업과 수업 사이 비는 시간에 밖에 나와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거든요. 


벌써 가을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단풍나무. 


길을 걷다 보니 푸른 잎 끝에 붉게 매달린 가을이 보여요. 바람개비 모양의 붉은 씨앗도 매달려 있고. 단풍나무는 가을도 벌써 준비하고 있나 봐요. 아름다우면서도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었어요.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요. 피부 안쪽으로 들어와, 몸 구석구석을 씻어주는 것 같아요. 눈을 감고 내리쬐는 햇살을 맞고 있으니, 소름 끼치도록 개운해졌어요. 무서운 얘기를 들었을 때 움츠러들면서 끼치는 소름과 달리, 세포에 맑은 공기가 차오르면서 깨끗해지는 느낌이 드는 소름이랄까요. 선배스 (sun bath)라는 말도 있지만, 선샤워 (sun shower)에 더 가까운 느낌이에요. 


물로 목욕하는 것보다 시원한 선샤워. 햇살을 쪼이는 시간을 하루 중에 가질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여유예요. 매일 이런 시간을 가지다 보니 이게 나의 일상이 되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지루하기까지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의 여유는, 과거의 내가 너무나 간절히 가지고 싶어 했던 사치스러운 순간이었어요. 회사에 매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느니, 밖에 나가 돈 없이 돌아다니고 싶었던 때가 있었답니다. 산책만으로 행복해지는 이 순간을 누리기 위해, 많이 싸우고, 배우고, 또 놓아 보냈어요. 


새삼 실감해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이 당연하게 내게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변함없이 다정한 자연의 도움을 받아왔는지! 


뜨거운 분홍빛. 왠지 열정이 넘칠 것 같은 아이들이에요.


따뜻해지면서 피어난 꽃들을 가득 찍었어요. 

예전엔 셀카를 찍기도 했었는데, 요즘엔 도통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아요. 주변에 온통 찍을 것 천지인걸요. 육안으로 보는 게 아름다우니, 카메라로 찍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많아요. 


살아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어요. 말이 없이, 조용히 힘차게 자라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와 꽃들. 바람에 잎이 흔들릴 때, 햇살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초록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눈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초록과 하양. 유익하고 예쁜 들꽃 개망초.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말에 묻혔던 바람 소리가 귓가에 나타나요. 그럴 때는, 건강한 청각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아무리 걸어도 나른한 날이에요. 나른하면 나른한 대로,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죠.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매일을 스스로 펼쳐나가고 있어 자유로워요. 지나가는 순간순간을 잡지 않고, 또 놓아 보냅니다.




과거의 내가 꿈꾸고, 간절히 바랐던 것들 중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있으신가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이 정말 당연했는지 숙고해 보세요. 

그리고, 당연하지 않음이 느껴질 때 어떤 생각과 기분이 드시는지 음미해 보세요 :)


당연하지 않은, 오늘 밤의 평화를 온전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 동네에서 자주 보이는 아이예요. 유독 하얘서 예뻐요. 


+

위로 고개를 당당히 든 이 꽃들을 피운 나무의 이름은 맥문동이래요. 오늘 산책 중에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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