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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반티카 May 18. 2024

채소 밥상을 보면서 마음이 이렇게도 벅차오르네요

2024 21일 루나 디톡스: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함명상 에세이 #11



작년 겨울부터, 역류성 식도염으로 한동안 고생했었어요. 나은 거 같으면 또 아프고, 또 아프고... 오래 가더라고요. 식도염에 걸려본 일이 거의 없어서, 이렇게 괴로운 일인 줄 몰랐어요. 식단을 정말 철저하게 지켰었어요. 조금이라도 맵거나 짠 음식은 다 빼고, 사과, 레몬, 귤 같이 산이 많은 과일도 다 빼고. 언제 낫나 할 땐 그렇게 안 낫더니, 식단을 지키면서 별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어라...?!' 


이제 토마토를 먹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맘 먹고, 마르쉐에 토마토를 사러 갔죠. 



이번 상반기에 국립극장에선 마지막으로 열리는 마르쉐.


어딘가 입구 쪽에 있을 토마토 농장 부스를 찾지 못하고, 베이커리에 먼저 갔어요. 일찍 갔는데도 벌써부터 줄을 서더라고요. 따가워지는 햇빛 아래서 주변 구경을 하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지 뭐예요. 세 부스쯤 떨어진 곳에 로즈 선생님*이 줄을 서 있었어요. 위아래로 흰색 요가복을 입고요. 조금만 걸어가면 인사할 수 있는데...! 혼자 줄을 서 있으니 그럴 수 없었죠. 


벽돌보다 단단하고 묵직한 품퍼니켈을 손에 들고, 토마토 농장을 찾아갔어요. 줄을 선 동안 로즈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죠.


“오랜만! 웬일이야?” 

“마르쉐에서 선생님을 봤어요.”

“그랬어? 아는 척을 해야지!”

“줄 서있느라고요.” 

“혼자 왔어? 지금은 어디야?”

“토마토 사러 왔어요.” 

“그거 줄 길던데, 꼭 사야겠어?”


물론 사야죠. 오늘의 목적은 토마토니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어요. 로즈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꼭 사야겠어?’ 


그래요, 선생님 말도 맞아요. 줄 서는 게 싫어서 맛집도 놀이동산도 가지 않는데, 토마토 줄이 왠말인가요?! 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에 직접 가서 사거나, 택배를 받는 것보단 이 편이 나아요. 이렇게 직접 와서 사면, 서로의 시간과 비용이 절감되니까요. 


”진짜 꼭 그렇게 사야겠어?“ 


귓가에 들려온 육성에 고개를 돌렸어요. 로즈 선생님이 저를 보고 웃고 있었어요. 


“선생님!” 

“자, 선물이야.“ 

충격적으로 예쁜 꽃다발 선물.

선생님이 내민 것은 큼직한 분홍꽃 세 송이가 담긴 꽃다발이었어요. 아무 날도 아닌데 받게 된 꽃 선물은 충격적이었어요. 정말 예뻤거든요! 


“선생님, 고마워요!” 


쑥스럽게 웃는 선생님의 표정은, 천진한 아이 같기도, 방금 막 피어난 꽃 같기도 했어요. 인사를 나누고 사라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일상복 차림인 사람들 가운데, 홀로 요가복은 정말이지 눈에 확 띄었답니다. 민소매 요가 탑이 시원해 보여서,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부럽기도 했어요. 












맛있는 채소 밥상(의 일부)

집에 돌아와 차린 주말 첫 끼는 파티가 따로 없었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된 무수분 토마토 보양숙, 농부님이 이른 아침 따오셨을 싱싱한 잎야채와 흙당근, 뜨듯한 오븐에서 열일곱 시간 후에 태어난 풍미 가득한 품퍼니켈. 


맛있는 건 마르쉐에서 사 온 채소들뿐만이 아니었어요. 사촌언니가 만들어준 오이 피클, 이웃이 나눠준 볶음 고추장(에 섞은 집에서 발효한 캐슈 치즈). 생협에서 데려와 소금 솔솔 뿌려 익힌 껍질 완두콩과 양배추, 브로콜리. 냉동실에 아껴두었던 펌퍼니클 슬라이스 - 품퍼니켈을 다르게 표기한 타 베이커리의 발음 표기법을 그대로 따랐어요 - 에 홈메이드 허니 머스터드소스를 넣은 포테이토 스프레드를 얹어먹으니 정말 정말 배불렀어요. 




포테이토 스프레드 온 더 펌퍼니클 (Feat. 이 빠진 접시)


야채만 먹는데 어떻게 배가 부르냐고요? 신선함과 맛이 살아있는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만족스럽거든요. 맛있어서 많이 먹게는 되지만!


화병에 꽂아 테이블 위에 둔 분홍빛 꽃들 덕분에도 더욱더 즐거운 식사이기도 했어요. 한 번의 즐거운 식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던 걸까요?! 농부님들, 베이커리 파티쉐 분들, 마르쉐 자원 봉사자 분들, 사촌언니, 이웃, 생협 직원 분들, 로즈 선생님. 채소가 자랄 수 있게 도와준 비, 바람과 햇살, 땅, 곤충과 벌, 땅속 미생물들, 질소와 탄소, 공기... 


채소 밥상을 보면서 마음이 이렇게도 벅차오르네요. 감사하다는 말에 다 담기지 않는 풍요로움이에요.


수많은 도움으로 자연과 멀리 떨어진 도심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신선한 채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현대 사회예요. 지금이 있기까지, 인류는 또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어왔나요. 비록, 발전을 이루다 이루다 환경오염에 이르게 되었지만 말이에요. 


이 역시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람들이 만든 마르쉐가 있어, 불필요한 포장 용기나 유통 과정 없이 장바구니를 가지고 가서 농부님들과 직거래를 할 수 있었네요. 인류가 만들어낸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명감과 열정으로 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생활이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지구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화창한 토요일, 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맛있는 식사를 하셨나요? 즐겼던 음식과 공간,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한 점이 있는지 찾아보세요. 


오늘 밤도 감사함이 깃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라요!  



+

꽃 포장지를 자세히 보니, "Happy Everyday"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매일 행복하세요, 여러분 :)


* 매거진이었던 <요가실록>에 등장하는 선생님들은 모두 과일, 또는 꽃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요. 로즈 선생님도 오늘 로즈라고 이름을 붙여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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