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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한 해를 기억하는 어떤 방법 4

10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활짝 피어있는 노란 국화를 보니 새삼 가을이 느껴집니다. 진한 향기가 나는 꽃잎에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습니다. 초록 잎이 진한 미국 낙상홍의 열매는 어느덧 빨갛게 익어갑니다. 보색의 신선함이 가득한 나무에는 멀리서부터 밝은 햇살이 다가와 살포시 내려앉고 있습니다. 맑고 투명한 가을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는군요.     


언제나처럼 하얀 구름이 흐르는 파란 가을 하늘은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을 보니 편안한 느낌도 듭니다. 가을은 이렇게 소리 없이 익어가고 있네요. 아직은 따가운 한낮의 햇살은 산사나무의 열매를 더욱 붉게 익어가게 하나 봅니다. 화사한 햇살을 받으니 빨간빛이 하얗게 반짝이는군요. 지난여름은 위대했다던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지난 계절에 열매 안에 담아왔던 햇빛이 이제 붉은빛으로 익어가는 것일까요?      


     

벌써 낙엽이 지기도 하는군요. 겹벚꽃 나무의 낙엽이 가득한 이곳의 매자는 화사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붉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햇빛을 가득 담고 있어서 인지 뜨거운 느낌마저 드는군요. 곱게 익어가는 가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11월. 이제 단풍나무들은 불이 난 듯 붉어집니다. 올려다본 하늘이 온통 붉은색이네요. 초록의 잎들이 빨갛게도 노랗게도 혹은 주황으로 물들어갑니다. 가을의 색깔을 이렇게 알록달록하군요. 늦가을은 많은 열매들이 점점 진하게 익어가는 계절인가 봅니다. 봄이 꽃이라면 가을은 열매일까요? 지난봄의 꽃들이 이제 열매가 되었네요. 꽃사과, 산사나무 열매, 매자나무 열매, 좀작살나무 열매, 산수유... 수많은 열매들이 여기저기에서 붉은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가지마다 붉게 익은 가을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듯하네요. 햇살을 받아 빛이 나는 붉은 야광나무의 열매는 뭔가 투명한 느낌마저 듭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은 좀작살나무의 보라색 열매에도 스며드는 듯합니다. 비록 잎은 다 말랐지만 열매는 더 진해지고 보랏빛 향기는 점점 더 농축되어가는 듯도 합니다. 밝은 햇살의 울림에 붉은 산수유 열매가 한가롭게 흔들거립니다. 노랗게 물든 잎과 빨간 열매를 뚫고 내려온 햇살은 낙엽이 가득한 땅에도 내려앉고요.      


환한 햇살을 받는 땅에서는 뭔가 불꽃이 이는 듯합니다. 남천의 잎에서도 불이 나는 듯하지만 검붉게 익어가는 열매는 타들어가는 듯하네요. 남천의 열매는 정말 강렬하게 익어가는군요.       


     

12월. 날씨가 쌀쌀해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추워집니다. 한 해는 이렇게 겨울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이 나는 것인가요? 낙엽이 지고 마른 가지만 드러난 겨울 풍경은 왠지 썰렁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네요. 메마른 대지에도 다가가 보니 생명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땅으로 돌아갔지만 아직 씩씩하게 남아 살아있는 계절을 느끼게 해 주는군요.     


지난 초가을에 하얀 꽃이 피던 배풍등은 이제 탄력 있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초록의 열매가 주황이 되더니 다시 주홍으로 변하고 마침내 빨간 열매가 되는군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는 줄기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며 끝에는 두 개의 열매가 열리는군요. 마치 붉은 등이 켜진 가로등을 보는 듯도 합니다. 배풍등의 등은 한자로 등나무 등(藤)이던데 왠지 등잔 등(燈)이어도 괜찮을 듯하네요.       


이제 첫눈이 내리니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갑니다. 눈을 맞으며 조금 더 포근한 풍경 속으로 산책을 하게 되는군요. 그런데 눈을 맞고 있는 열매들은 더욱더 진한 색감을 보여주며 다시 촉촉한 생기가 올라오는 듯도 합니다. 빨간 낙상홍 열매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직 탄력이 남아있는 열매들은 흰 눈을 맞아 상기된 듯 더욱 붉은 색깔을 보여주는군요. 하얀 눈에 파묻혀있는 빨간 남천 열매, 달려있는 것이 보라색 열매인지 흰 눈인지 모를 좀작살나무, 눈의 결정과 함께 하늘거리는 배풍들의 붉은 열매 그리고 붉은 색감에 눈이 말갛게 녹아내리는 야광나무 열매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춥지 않은지 다들 즐거운 표정이네요.


하얀 눈은 매자나무의 긴 가지에도, 검붉게 익어가는 열매에도 내립니다. 사각사각하는 사뿐한 발걸음처럼 미세한 소리를 내며 소복이 쌓여가는군요. 그런데 하얗게 빛나는 설경을 바라보던 산책자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붉은 열매에서 녹아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니 이제 그만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게 되는군요. 그것이 대자연의 순리일 테니까요.      


     

이제 나무들은 한 겨울에도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화사한 햇살에 얼음이 녹고 부드러운 남풍이 불어오면 파릇한 새싹을 돋우겠지요. 어쩌면 반복되는 듯한 자연의 순환은 사실을 새로운 순환 인지도 모릅니다. 올해의 꽃은 작년의 그 꽃이 아니고, 올해의 열매는 작년의 그 열매가 아닙니다. 내년의 꽃과 열매도 새로운 것이겠죠. 우리네 삶도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고 오늘 같은 내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해를 돌이켜보니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네요. 마치 바람의 노래처럼 울려 퍼지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여성합창을 들어봅니다. 보로딘의 오페라 '프린스 이고르'에 나오는 폴로베치안 댄스에서는,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의 울림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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