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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겨울로 향하는 열매들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을 오디오 북으로 들었습니다. 제법 긴 분량인데 눈을 감고 듣는 느낌도 좋군요.       


처음에는 뭔가 낯선 느낌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어쩌면 순수한 청소년의 시선에 담긴 기성세대는 그렇게 본질은 상실하고 겉멋만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어른들의 시선으로 보면 그는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런데 샐린저의 문장은 뭔가 흡인력이 있네요. 대상에 대한 관찰뿐만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정과 생각을 그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청소년의 성장과정에서 겪는 세상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보여주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문장이 주는 느낌 또한 좋군요. 기억하고 싶은 몇 장면의 문장들을 남겨봅니다.     


주인공은 박물관에서 유물을 바라보며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있네요.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중략)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이번에는 코트를 입고 있다든지, 지난번에 왔을 때 짝꿍이었던 아이가 홍역에 걸려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처럼, 아니면...'

     

어쩌면 그의 순수함은 여동생 피비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는 듯합니다. 그리고 왜 호밀밭의 파수꾼 인지도 말해주고요.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여동생의 질문에 그는 약간 생각에 빠집니다. 그런데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군요.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 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중략)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그리고 그는 목마를 타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낍니다. 아마도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떠나려는 동생의 마음을 잘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퍼붓기 시작했다. (중략)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중략)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그는 분명 성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한때 위선자처럼 보이기도 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요.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중략)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그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자신만의 순수한 세계에서 살고 있던 청소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 세계를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대답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순수와 함께 혼란스러웠던 생각들은 이제 희미한 기억 속에 아스라하게 떠오를 뿐이네요.


낮지만 계속해서 출렁이며 다가오는 마음의 파문을 느끼며 겨울날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 같으니까요. 날씨는 흐리고 생각보다 차갑습니다. 나뭇잎들은 이제 거의 떨어졌고 붉은 열매들만이 남아 한겨울로 향하는 계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갈색으로 변한 나뭇가지에는 몇 알의 미국 낙상홍의 열매가 빨갛게 빛나고 있습니다.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빨간 열매가 다정한 모습이네요. 어쩌면 빨간 열매는 이 한 겨울을 지키는 파수꾼일까요? 아니면 그런 오빠를 지켜주고 싶은 동생 피비의 순수한 마음 같은 것일까요?      



진하게 얼룩이 져가는 몇 장 남지 않은 잎 사이의 붉은 열매들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어떤 삶의 환희마저 느껴지는군요.      


말라버린 듯한 매자의 가지 아래에도 두 개의 붉은 열매가 반짝입니다. 이제 그녀들은 내년 봄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흐릿한 느낌도 좋네요. 마른 잎과 붉은 열매들이 깊어지는 계절 속으로 점점 걸어 들어가는 듯합니다.       


좀작살나무의 열매는 비록 주름이 많이 졌지만 색깔만은 더욱 진해진 느낌입니다. 보랏빛 열매들이 반짝이며 아직은 단단하게 달려있네요. 열매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함께 어떤 보람마저 담겨있는 듯합니다.     


봄날의 꽃도 아름답지만 이 계절의 열매들은 약간 숭고한 느낌마저 듭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하고 최선을 다해 키워온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일까요? 이제 그녀들이 자연으로 잘 돌아가, 긴 겨울을 잘 버텨내고 내년 봄에는 다시 새싹으로 돋아나기를  기다려봅니다. 잘 익어 더욱 고마운 그녀들과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3악장을 들어봅니다. 바람 끝은 여전히 차갑고 산책자의 볼도 붉어지는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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