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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2. 2022

겨울 열매들 그리고 '설국'

하늘은 맑고 파란데 아침 공기는 제법 차갑습니다. 이제 겨울이라고 인정하게 되는군요. 하지만 열매들은 여전히 붉은데 차가운 바람에 더욱 상기된 듯합니다. 야광나무의 빨간 열매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빛이 납니다. 차가운 바람에 살짝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더욱 신비한 느낌인데 뒤쪽에 흐릿하게 보이는 열매들은 왠지 봄날의 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붉었던 열매들의 색깔이 다양해졌습니다. 여전히 빨간 열매가 많지만 어떤 열매는 노랗게 어떤 열매는 다갈색으로 변해가기도 하는군요. 가는 줄기마저 빨간 열매들이 길게 늘어져 겨울 햇살을 받고 있습니다.       


그늘 쪽에서 익어가는 산수유 열매에는 아직 아침 이슬이 담겨있습니다. 그녀는 원래 이렇게 연한 주황색이 내려앉으며 익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뽀얀 살결의 그녀가 세수를 하다가 깜짝 놀라는 듯도 하네요. 벌써 조금씩 말라 가기도 하는 그녀들은 약간 깊은 보조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제 매자나무의 잎은 거의 다 떨어지고 붉은 열매들만이 가지와 함께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른 가지에게는 이제 검붉어진 열매가 약간 무거워 보이기도 하네요. 알싸한 아침 바람에 따라 겨울 소리를 내고 있는 때죽나무 열매의 겉껍질도 바라봅니다. 그런데 찬바람은 품 안으로 파고들고 손은 점점 굳어오는군요.


뜨거운 커피를 큰 잔으로 준비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오디오북으로 들어봅니다. 문득 느껴지는 겨울날에 온통 흰 눈으로 가득한 눈 고장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서죠. 작가의 감각적인 문장을 눈을 감고 듣고 있으니, 하얀 눈 속에서 잔뜩 상기되었을 고마코의 붉어진 얼굴도 상상이 됩니다.     

'설국'은 문자로 된 소설이라기보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긴 두루마리 그림 같기도 합니다. 작가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섬세한 묘사 그리고 심정의 표현은 잔잔하게 흐르는 동영상 같기도 하고요. 어찌 보면 이 소설은 그냥 그 문장들을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서정적이면서도 회화적인 그의 문장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남겨봅니다.     


설국으로 향하는 열차의 유리창에 비친 여인을 바라보며 그는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중략)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그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느끼는군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중략)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중략)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어쩌면 작가 자신일듯한 시마무라는 샤미센을 켜고 있는 고마코의 모습을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문장을 따라가 보니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가늘고 높은 코는 다소 쓸쓸하게 마련인데 빰이 활기 있게 발그레한 덕분에, '나 여기 있어요'하는 속삭임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윤기도는 입술은 작게 오므렸을 때조차 거기에 비치는 햇살을 매끄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더욱이 노래를 따라 크게 열렸다가도 다시 안타깝게 바로 맞물리는 모양은 그녀의 몸이 지닌 매력 그대로였다. 약간 처진 눈썹 밑의, 눈꼬리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일부러 곧게 그린 듯한 눈이 지금은 촉촉이 빛나 앳돼 보였다. (중략) 백합이나 양파 구근을 벗겨낸 듯한 새하얀 피부는 목덜미까지 은근히 홍조를 띠고 있어 무엇보다 청결했다. 반듯이 몸을 가누고 앉은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처녀다워 보였다.'


격한 사랑을 느끼면서 이별을 떠올리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쩌면 삶은 허무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 순간순간에 더욱 빛이 나는지도 모르고요.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손을 잡았다. (중략) 시마무라의 손도 따스했으나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죽어가는 곤충들을 보면서 그는 왜 집에 있는 아이들을 떠올렸을까요? 그리고 어째서 이토록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창문 철망에 오래도록 앉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고마코와 함께 강기슭의 벼랑을 거닐던 시마무라는 가을 햇살에 흩날리는 억새의 꽃들을 보며 이렇게 느끼는군요.      


'건너편 기슭의 급경사 진 산허리에는 억새 이삭이 온통 꽃을 피워 눈부신 은빛으로 흔들렸다. 눈부신 빛깔이긴 해도 마치 가을 하늘을 떠도는 투명한 허무처럼 보였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바람을 잔뜩 들이마셨다가 한꺼번에 토해내는 느낌이 듭니다. 잔잔히 퍼져오는 허무의 냄새와 슬금슬금 일어나는 아름다운 느낌을 동시에 간직하며,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을 들어봅니다. 뭔가 느리고 무겁게 시작되는가 싶더니 맑고 투명한 음색이 날아오르는 듯합니다. 마치 밝은 햇살에 반짝이던 눈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도 하고 어두운 밤하늘에서 은색의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도 합니다. 오늘 밤에는 눈이 내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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