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온통 열기가 가득합니다. 삼복더위라는 말처럼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는군요. 하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더위속에서도 꽃들은 피어나고 있을 테니까요. 뜨거운 한 여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데 햇빛은 강렬하고 나뭇잎은 초록이 짙어졌습니다.
그늘 쪽으로 걷는데 익숙한 모양의 초록 잎과 하얀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모처럼 보는 박주가리네요. 연두색의 긴 줄기가 풀숲의 낮은 땅으로 뻗어 나오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꽃이 활짝 피어있습니다. 하얀 미소에 담긴 진한 향기를 맡아보니 산책자의 얼굴에 미소가 저절로 피어오릅니다. 박주가리의 진한 향기는 언제 맡아도 향기롭네요. 멋진 모양의 초록 잎도 하얗게 피어나는 꽃도 생생한 느낌입니다.
좀작살나무의 연한 보랏빛 작은 꽃들은 이제 열매가 되었습니다. 단단한 느낌의 잎 사이마다 연두색 열매들이 가득 달려있군요. 초록 잎 사이에 아직 피어있는 꽃을 봅니다. 여린 잎 사이에는 아직 연두색 꽃봉오리도 보이네요. 오랜 시간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 고맙기만 합니다. 꽃은 피어 열매가 되고 이제 꽃잎은 말라갑니다. 어쩌면 올해는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를 그녀들의 아스라한 미소가 느껴지네요. 하지만 그것은 산책자의 느낌일 뿐 그녀들은 기꺼이 열매가 되어갈 듯합니다.
매자의 잎들이 알록달록합니다. 주홍색, 주황색, 연한 자주색 그리고 초록색이 섞이며 색색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왠지 가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산책자를 매혹시켰던 그 색깔이네요. 주홍색과 자주색 잎들 사이에는 붉은 매자가 진하게 익어가는데 옆 가지에는 초록의 열매도 단단하게 익어갑니다. 뭔가 씩씩하게 익어가는 매자의 묵직한 호흡도 느껴집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옵니다. 조심조심 그녀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마른 줄기에서 쉬어가는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가 햇빛에 반짝이는군요.
길을 걷다 보니 매미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왠지 폭포 소리 같기도 합니다. 잠시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뜨겁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햇빛을 가득 받는 능소화의 꽃은 더욱 강렬한 느낌입니다. 하늘을 향해 붉은 나팔을 힘차게 불고 있습니다. 살짝 그늘진 곳에서는 더욱 붉은 느낌입니다. 뭔가 뜨거운 소리가 울려 나오는 듯도 합니다.
화사한 색감의 무궁화도 활짝 피어있습니다. 연한 보라색 꽃잎의 안쪽에서는 빨간 정열이 점점 퍼져 나오는 듯합니다. 그늘에서 곱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사랑스럽기도 하고 경건해지기도 하네요.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단아한 느낌 때문일까요? 문득 '화이불치(華而不侈)'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꽃들이 굳이 뜨거운 여름에 피어나는 것은 그녀들만의 이유와 전략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산책자에게는 뭔가 더위를 즐기면서도 이겨내는 그녀들의 씩씩함이 느껴집니다. 등줄기에 땀이 흐릅니다. 하지만 지금 피어나는 꽃들처럼 이 더위를 즐겨보기로 합니다. 언제 이렇게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닐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땀을 흘리고 나서 찬물에 샤워하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 사이를 뛰어오던 어떤 소녀가 손에 들고 가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립니다. 아깝다는 탄성과 함께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할아버지를 부르는군요.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소녀에게 할아버지는 안 넘어져서 다행이라시며 다시 한 개를 사주신다 하시네요.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햇살이 뜨겁게 이글거리는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가네요. 진한 초록의 잎 사이에는 꽃도 피어있고요. 그늘의 벤치에 앉아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티를 마시며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 '폭풍우(Storm)'를 들어봅니다. 디베르티스먼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강렬하고 영상도 멋집니다. 그들의 다이내믹한 사운드가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카락도 날리고 악보도 날리는군요. 왠지 비가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