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는 풀, 아버지에게는 맛있는 입맛
겨울이 지나고 춘분이 다 되었는데도 마른 겨울을 젖게 할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입학 후 4월이 되면 유아들은 놀이 시간과 정리 시간을 구분하고 ‘모두 제자리’ 노래에 반응한다. 교실과 유희실, 도서실 등 공간이 다르게 쓰임도 알게 된다. 동화를 듣는 시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덧붙여 이야기 꾸미기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유아들은 아침에는 미세먼지 신호등을 우선 확인하고, 교실에서는 창밖 놀이터를 수시로 쳐다본다. 왜냐면 바깥 놀이를 나가기 위하여 미세먼지가 좋음이어야 하고 비가 내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꼬마들이 가장 기다리고 기다리는 즐거운 시간은 바깥 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깥 놀이는 유아들을 교실 밖으로 유인하는 강력한 자력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에너지의 성분이 대단히 궁금하였다. 바깥 놀이를 나가면 운동장 산책을 하고 기린숲 놀이터에서 모래놀이와 집라인을 탔다. 햇살을 품고 스스로 햇살이 되어 뛰어다니는 유아들에게는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호기심이 표출의 대상이 된다.
“선생님 이 풀은 왜 흙 동산에 있어요?”
하람이가 내민 것은 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이한 쑥이었다. 이 쑥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함께 먹었다 귀한 식물이라 할까? 아니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르미테스 즉 여성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을 딴 아르테미지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식물이라고 설명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람아! 이 건 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봄나물 쑥이야. 국도 끓여 먹고 맛있는 떡을 만들기도 해”
“ 앵 징그러워 왜 이런 풀로 떡을 만들어요? 예쁜 꽃들도 많은데.”
풀이 떡이 된다는 황당한 설명에 하람이가 내게 주고 간 쑥을 보니, 진초록에 털까지 난 모양이 인간에게 가장 사랑받는 허브라고 믿기에는 썩 예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쑥은 들고 있는 나를 유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1970년대 충청도 산촌의 마을에 봄이 오면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어 달래, 냉이, 씀바귀, 쑥을 뜯어 반찬을 했다. 엄마는 딸 넷을 낳고 막내로 아들을 낳은 체구가 작지만, 반찬을 맛있게 하시는 마을의 대장금이었다.
“ 집안에 딸이 몇인데 밥상에 나물 한 가닥이 안 올라와?”
봄이면 봄마다 아버지가 부르시는 노래였다. 약식동원의 진리를 터득하신 아버지의 노래에 대한 응답인지, 반찬 걱정하는 엄마의 걱정을 덜기 위함인지, 이도 저도 아닌 언니들 없이 마땅한 놀이도 없어서 나는 바구니와 작은 칼을 들고 나물 캐기에 참여했다.
나는 도대체 먹을 수 있는 풀인 나물과 먹지 못하는 풀을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큰언니는 잎사귀가 뾰족하고 향기가 진한 것이 냉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잎이 뾰족하고 땅에 넓게 누워서 크는 비슷한 풀이었다. 생태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인데 봄나물 대부분은 태양을 많이 볼 수 있는 로제트식물 잎 구조를 하고 있다. 내가 나물이라고 캔 바구니를 큰언니에게 가져가면 냉이라고 골라낸 것은 반 소쿠리 정도였다. 달래는 키가 크고 잎이 통통하다고 했으나 이 또한 구별하기는 힘들 정도로 키와 잎의 굵기가 모두 달랐다. 씀바귀는 일단 뿌리의 진액이 만지기 불편하였다. 봄나물 찾기는 시험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힘들까.
나에게 나물 찾기가 모두 힘든 것은 아니었다. 봄나물 중에 쑥은 잘 찾아 캘 수 있었다. 쑥은 냉이보다 초록이 아닌 회색 털이 덮인 짙은 초록이었고, 쓴 냄새가 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나간 나물 캐기지만 언니들 따라 봄기운 가득한 밭과 뚝, 산기슭에서 부드러운 흙을 밝으며, 나물의 뿌리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신나는 놀이였다. 나물바구니를 보며 칭찬해 주시던 엄마의 표정과 풍성한 저녁상은 놀이터도 유치원도 없던 내 유년의 맛있는 봄이었다.
친정아버지의 입맛도 바뀌어 이제 봄이 오면 도다리 회를 찾으신다. 산촌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가 나물보다 흔하게 활어회를 드시는 어촌에서 자라셨다면 향긋한 봄나물이 아닌 활어회를 찾으셨을까? 나는 봄마다 들로 나가 구별이 안 되어 찾기 힘든 나물을 캐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자란 산촌과 내 몸을 봄 향기로 채우던 봄바람의 온기를 떠올리며 입 안에 군침이 돈다. 이 맛있는 버릇이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맛있는 봄이다.
이런 이야기를 모래 놀이터를 뛰어다니는 저 유아들에게 한다면 공감해주지 않을 것이다. 되려 그렇게 맛있게 먹은 초록 떡에 이런 풀이 들어 있다고 마음 상할 수도 있겠다.
‘봄나물은 저 유아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 귀한 것인데.’라는 의지가 주변의 쑥을 뽑게 하였다. 모래가 많은 땅이라서 그런지 금방 장난감 바구니에 반을 채웠다.
“하람아! 친구들아! 우리 쑥떡 만들까?”
호기심에 고양이 눈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몇 명이 모여들었다. 당장 유치원에 쌀가루가 없었지만, 21세기의 유치원에는 쌀가루 반죽보다 희고 부드러우며 점성까지 좋은 천사 점토가 있었다. 장난감 그릇에 쑥을 찧어 쑥물을 만드는 놀이는 만들어진 물감을 사용하는 것보다 열 배는 어려웠으나, 유아들에게 놀이는 무엇이든 즐거운 도전이고 문제해결력을 높이는 신나는 성장이었다. 얼마 안 되는 쑥물을 천사 점토와 섞어 스마일 쑥개떡, 일그러진 송편, 떡 케이크까지 만들어 쟁반에 담아 그늘에 두기로 했다.
엄지 척을 하람이와 친구들은 감동에 감동을 더한 눈빛으로 쑥은 바라보았고, 모래 반 점토 반 떡을 빚은 유아들은 또 쑥을 찾아 나서겠다고 하며 엄지척을 했다. 놀이를 지원한 나를 칭찬하는 것일까? 쑥을 칭찬하는 것이었을까?
관심 없던 풀 쑥이 초록색의 맛있는 떡이 되는 원리를 단번에 알아버린 유아들과 쑥은 쑥쑥 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이들은 쑥쑥 자라서 쑥이라 했단다. 이름까지 멋진 쑥이다.
오늘 쑥떡을 만든 유아들은 봄이면, 향긋한 향기로 입안을 채우고 시린 겨울을 난 몸을 깨우던 봄나물에 대한 기억이 맛있는 버릇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쑥만 보며 초록색 쑥떡을 떠 올리며 쑥떡을 만들고 싶어질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19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배운다면 쑥이 그리고 봄나물이 맛있는 버릇이 된 사연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똑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이 놀이를 통하여 유아들과 나는 이렇게 맛있는 버릇을 나누어 가졌다.
따스한 흙의 가슴이 겨울 녹일 즘
당신은 딸들 지팡이 삼아
들로 나가셨지요
쌉쌀한 씀바귀 뿌리까지 캐고
꽃 피기 전 냉이로 바구니 채울 때
연한 새것, 쑥 내음 깨워
식구들 푸석한 겨울 몸에
봄을 피워보자고
그 맛 그리워
딸 손잡고 들로 나간 오늘
납작 엎드린 민들레가
당신처럼 반가워 군침 도는
<맛있는 버릇>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