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식지 않을 만큼의 거리
아침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원두를 갈아 거름망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물을 내린다.
보글보글, 톡톡.
원두가 부풀어 오른다.
자신의 색을 온전히 내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듯, 알갱이는 터지고 꺼지며 진한 향을 남긴다.
스스로를 태워 한 잔의 커피가 되는 원두를 보며 나 또한 오늘 하루의 의지를 다독인다.
커피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다. 아침마다 학교 매점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던 100원짜리 믹스커피가 습관이 되었다. 그 후로 자판기 믹스에서 카누로, 카누에서 원두로 바뀌었지만 ‘커피로 하루를 연다’는 일상의 리듬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위장염이 심해지는 바람에 커피를 강제로 끊어야만 했다. 고작 커피 한 잔의 아침 루틴이 사라졌을 뿐인데, 하루가 엉켰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사라진 아침. 무의식적으로 컵을 찾다가 멈칫했다.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새끼 양처럼 두리번거렸다.
“커피 한잔?”
동료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커피 한 잔 타서 회의실로 오라며 눈짓했다.
아침이면 함께 커피를 마시며 스몰 토크를 나눈다. 평소처럼 커피를 들고 가야 했지만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아 회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은 뭐 했어? 달리기는 했어?”
커피가 없으니 대화도 어딘가 밍숭맹숭하다.
그제야 알았다.
커피 한 잔이 우리 사이의 온기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걸.
커피가 추출되는 동안, 커피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데워진다.
마시기 딱 좋은 온도.
입도 데이지 않고 목 넘김도 자연스럽다.
동료와의 관계도 그렇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는 적당한 거리가 있다. 직장 내에서 업무와 평가, 성과로 엮인 관계이다 보니 그 이상으로 다가가기도, 멀어지기도 어렵다.
너무 뜨거우면 부담스럽고, 너무 차가우면 불편하다. 그래서 관계에도 적절한 온도가 필요하다.
매일 아침 나누는 커피 한 잔이 바로 그 온도를 맞춰준다.
비단 직장만이 아니다.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이나 여러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제각기 자신만의 열정으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 열정만으로 모임을 오래 이어갈 수 없다.
파에톤이 자신의 욕망과 열정만으로 태양마차를 몰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추락했듯,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와 온도가 필요하다.
커피 한 잔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을 때 가장 맛있다.
사람 사이도 그렇다.
마음이 데이지 않을 만큼의 온기,
마음이 식지 않을 만큼의 거리.
우리는 매일 관계 속에서 온도를 조율하며 산다.
그 미묘한 균형 속에서 관계는 오래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