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아마 가을이었던 것 같다.
푸른 잎이 곱게 물드는 그 계절에 찾아왔던 한 여검사가 있었다.
공부 잘해서 검사까지 된 여자가 미모까지 겸비해 인상이 제법 짙었다.
검사라 바쁜지 계속 아버지란 사람한테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받았다. 이름까지 몰랐던 나는 아버지한테
“아 우리 (검사) 아가씨가 이런 걸 이야기하던데요?”
하면서 상냥하게 묻는데 갑자기 노발대발하며
“아니 아가씨라니!”
“네?”
“검사님한테 아가씨라니!”
라며 소리를 버럭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너무 소릴 질러대서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손님은 왕인데 감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꼬박꼬박 극존칭을 해대며 기분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한 편으로 생각했다. 참 딸내미가 대한민국 검사가 되니 아빠 목에 저리 힘이 들어가는구나 하며.
아무튼, 검사를 1천-80의 오피스텔 입주시켰다.
그런데, 몇 달 안 돼 그 오피스텔의 임대인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돈이 안 들어온다고.
연락이 안 된다고.
이는 이쪽 업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간혹 사라지거나 연락 안 받는 상황이야 쌔고 쌨으니까. 나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오피스텔로 갔다.
그런데 오피스텔을 갔더니, 검사가 아닌 낯선 남자가 문을 빼꼼 열고 나왔다, 그는 자신을 여검사의 남동생이라 소개하며, 미국에서 공부하다 잠시 들렀다고 했다. 나 참, 집안은 쌈박한데 돈을 이리 안 내다니, 헛웃음이 다 났다.
여하튼, 별 제대로 된 대답을 잠시 방문했다는 아들내미한테서 들을 순 없었던 터라, 결국 난 이들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다.
처음과 달리 목소리에 힘이 빠진 아버진 자꾸 남의 다리 긁는 소리만 했다.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의 딸인 검사는 말할 때마다 언제나 목청을 낮게 깔고 무겁게 남을 짓누를 듯 우렁차게 하며 깔보기만 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이고, 어쩌랴, 손님은 왕이고 검사님은 검사님인데.
나는 속이 아린 것을 참으며 그들을 견뎌냈다.
그런데 웬걸, 나중에 그이들에 대해 들었는데, 어이가 없다 못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검사가 아니었단다. 후에 로펌에 취직했으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아서 자주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남동생은 웬일인지 갈 곳이 없어 누나의 원룸 오피스텔에 얹혀살아야 하는 처지였고 말이다.
결국 이들은 다시 집을 내놓았고, 이 과정에서 나는 그녀의 정확한 상태를 알게 되었다.
검사의 정체는 강박이 있는 망상증 환자였다.
혼자 계속 흥분하고 중얼대고, 이상한 눈빛으로 째리고 날 범죄자 추궁하듯 소리를 질러대고. 누가 자신을 업신여기면 견디지 못해 하는, 이른바 피해망상이 심각했다.
어딘가 계속 불안해 보이는 검사를 보니, 문득 그녀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자칭 검사 양반의 아버지는 아이의 상태가 이런데 왜 그런 태도를 보인 걸까.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런 때가 있었다. 형제가 여럿이라 전부 교육을 시킬 수 없어 장남한테 모든 걸 쏟아붓던, 생선 가운데 토막은 장남 몫- 대가리 꽁지는 딸들을 주며 의사 검사 만들면 평범한 집안이 의사, 법조인, 교수 집안 되던 시절 말이다.
분위기를 보니 딱 견적이 나왔다. 그 아버지도 아마 그런 집안에서 자랐겠지. 자녀들이 아버지 눈치를 보며 석연치 않아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
돌이켜보면 나도 애들한테 좀 구식 엄마였던 것 같다.
내 생각을 마치 가장 옳은 이야기인양 주입시키고, 아이들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았던 엄마. 내 아이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소름 끼치는 생각을 했더랬지.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우리 아이들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엄마가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었듯이 키웠으면 좋았을 걸, 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마음이 앞서는 엄마보다 그저 이쁘게 바라봐주는 할머니가 아이들 인성에 감성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끔 엉뚱한 보약만 어디서 얻어다 먹이지 않는다면 ㅎㅎ,,
(우리 둘째 아이는 외할머니가 가져온 이상한 보약을 먹고 몸이 두 배로 불었었다)
아무튼! 다 키워놓고 보니 알게 되었다.
아이들한테 말하기보다 아이들 말을 들어주는 게 훨씬 좋은 교육방법이었다는 걸.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아이들이 자식을 낳는다면
꼭 이 말은 해주고 싶다.
바라봐주고, 들어주고,
그저, 따뜻한 빛이 되어주라고.
2022.04.16 나만의 공간 드레스룸 한 귀퉁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