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서 SF까지
국가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환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끊임없이 가져왔다. 마법세계나 요정, 유령, 주술사 등이 등장하는 민화나 신화를 가지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환상문학, 혹은 판타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전무후무한 흥행 장르라 볼 수 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콩쥐팥쥐(선녀), 장화홍련전(귀신), 해와 달이 된 오누이(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등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 사건은 보통 깊은 산속이나 숲 속,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한밤중에도 자주 일어난다. 옛 사람들은 본인들의 삶과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막을 두른 듯한 미지의 영역에 신비성을 부여했다.
판타지에서는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우선, 마법으로 대표되는 환상성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에 관한 다양한 예시가 있겠지만 필자에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소설 <립 밴 윙클>이다. 유령들의 술을 마시고 잠이 든 립 밴 윙클이 깨어나 보니 20년이 지나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권선징악 같은 메시지 없이, 일어나 보니 세상이 뒤바뀌어있다는 데에 집중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것뿐이었다면 판타지가 이렇게까지 인기 장르가 되지는 못했다. 판타지는 교훈이나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 창작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수많은 동화가 그 예시이다. 괴롭힘 받던 거북이를 구해줘 용궁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우라시마 타로'의 이야기도 (적어도 초반부는) 교훈적 환상문학의 한 예시이다.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판타지의 사례로는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가 있다. 인어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동화는 당시 실연을 겪은 안데르센이 집필했다. 명확한 교훈이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며, 작가 본인의 경험이 판타지를 배경으로 펼쳐진 사례이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판타지에도 뜻밖의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기술의 발전이다. 전구가 밤과 밤길을 밝히고, 잠수함으로 바다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시대에 더 이상 마녀와 인어가 숨어있을 곳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판타지 애호가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늘 그렇듯 사람들은 답을 찾아내는 법이다. 판타지 장르에 마법의 빈자리를 메꿀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창작계에 SF가 도래했다.
덜 신비해진 옛 소재들(다시 말해, 산, 숲, 바다, 어둠 등)을 대신할 새로운 소재로 과학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과학의 위상 변화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과거, 과학은 학자들의 것이었다. 자연 속 여러 원리를 밝히고 진리를 탐구하던 과학자들이 세상에 수많은 족적을 남긴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이 성공의 직접적 수혜를 얻을 기회가 적었다. 실생활과 괴리된 과학 연구는 당장 먹고사는 일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1772년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숯과 다이아몬드가 모두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숯과 다이아몬드를 태워서 밝혀냈다는 사례를 통해, 당시 과학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여러 신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유래 없는 속도로 급격히 변화했다. 과학 발전이 실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늘어났으며, 결과적으로 기술과 과학은 대중들에게도 몹시 친밀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대중들이 과학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본인들의 삶과 맞닿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이 생겼다. 이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신비로운 영역이 새로운 창작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기존 생활을 뿌리째 뒤흔든 것처럼, SF도 창작계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충격을 주었을까?
기존 판타지 장르가 가지고 있던 환상적 상상력은 SF로 넘어가며 그 모습이 바뀌었을지언정 계속해서 유지된다. 마법은 신기술이 되었다. 인어나 오거와 같은 민화 속 신비로운 생물의 역할은 외계인이 대신한다. 밤이나 해저와 같은 알 수 없는 시공간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알 수 없는 장막 뒤의 미래로 대체되었다.
환상성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판타지의 풍조는 특히 하드 SF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드 SF란, 과학적 사실과 엄밀한 논리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SF의 한 분류이다. 공상을 작품 속에서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한 마법을 SF에서 펼치기 위해, 창작자들은 신기술을 고안하고 사고실험을 진행한다.
판타지의 우화적 요소 또한 SF로 이어진다. 창작자들은 SF적 배경과 설정을 빌려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현실의 요소들을 풍자하거나, 인간 본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SF적 상황을 설정한다. 전자의 예시로는 <스타트렉> 시리즈를, 후자의 예시로는 드라마 <블랙 미러>를 들 수 있겠다.
판타지의 환상적 배경은 SF에 어떻게 계승되었을까. 우주, 해저, 미래 세계 등의 다양한 배경이 있지만 이번에는 달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옛날부터 마법적인 이미지가 존재해 심심찮게 작품에 등장한 친숙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한 점이 한가득 남아 있는 달이 SF에 맞춰 변주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 더불어 외계인, 우주 등의 인기 소재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인기의 한 요인이다. 1902년에 나온 최초의 SF 영화 <달 세계 여행>도 달과 외계인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익숙하고도 비밀스러운 시공간이 여전히 배경으로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SF와 판타지는 소재의 특성, 메시지, 배경까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SF를 판타지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SF는 한순간의 유행이나 판타지의 한 갈래로 그치지 않았다. 창작자들은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소재를 생각해내고 작품을 창작해 SF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현실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엄밀하게 전개하여 작품 속 소재들이 단순한 공상 이상의 현실성을 갖게 했다. 이로 인해 작품 속 이야기들이 언젠가 장막 뒤에서 나와 현실에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판타지와 다른 SF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이다.
사람들이 지닌 미지와 신비를 작품 속에서 펼쳐주는 판타지와 SF는 몇 세기에 걸친 인기를 구가해왔다. 책, 극, 영화, 게임, 웹툰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판타지 및 SF 작품들이 나온다는 것은 장르의 높은 대중성을 증명한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꿈과 환상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 앞으로도 다양한 형식으로 다양한 판타지 및 SF 작품이 나올 것이다.
이미지 출처
Rip Van Winkle - Wikipedia
The Little Mermaid - Wikipedia
Steam engine - Wikipedia
Star Trek (TV Series 1966–1969) - IMDb
Black Mirror (TV Series 2011–2019) - IMDb
Le voyage dans la lune (Short 1902)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