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시리즈를 통해 보는 각색
2018년 4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마블 코믹스의 각종 에피소드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각색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 마침내 나온 최종 보스 등의 요소와 각색 과정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충격적인 결말은 영화를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각색은 이 영화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으며, 대다수 작품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변형시키는 길을 택한다. 이번 글에서는 작품의 대표적 변형 방식인 각색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앨리스> 시리즈는 인기와 특유의 분위기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그 자신도 영화 등의 다양한 형태로 수차례 각색되었으며 각 각색본은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그중 1903년의 영화와 1951년의 애니메이션, 2010년의 영화, 2011년의 발레를 살펴볼 것이다.
각색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충실성(fidelity)과 변형성(transformation)이다. 영화 이론가 더들리 앤드류는 ‘각색의 임무는 원작 텍스트에 관한 본질적인 어떤 것을 영화로 재생산하는 것’이라 전제를 정한 후, 원작 소설과 영화 사이의 각색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이때 원작의 텍스트 속 이야기적 요소들은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용되어 기계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원작의 톤, 가치, 이미지, 리듬 등 원작 정신에 대한 충실성 문제는 더욱 논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는 영화 속의 미묘한 측면들에 대응하는 스타일상의 등가물을 찾는 것은 영화 메커니즘적 과정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예술가들은 원작의 느낌을 직관적으로 재생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설명한다. 결국 앤드류의 논점은 각색이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가 혹은 그 원작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에 놓여있다.
-더들리 앤드류, <영화이론의 개념들>, 김시무 외 역, 시각과 언어, 1995년, 148쪽 / 김윤아 (2011), <우는 앨리스, 불안한 앨리스, 전사 앨리스>에서 재인용
영화이론가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는 그의 저서 <영화의 이해>(Understanding Movies)에서 각색법을 3가지로 구분한다. 그는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을 원작에 대한 충실도를 기준으로 ‘느슨한 각색(the Loose adaptation)’, ‘충실한 각색(the Faithful adaptation)’, ‘원작 그대로의 각색(the Literal adaptation)’으로 분류했다.
‘느슨한 각색’은 문학 텍스트로부터 어떠한 아이디어나 상황 또는 등장인물만을 선택한 후 원작과 상관없이 독자적이고 자유롭게 시각적 이미지로 영화를 진행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충실한 각색’은 최대한 원작의 정신에 가깝게 문학 작품을 영상적 시각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원작 그대로의 각색’은 원작의 요소들을 원작에 근접하게 옮겨놓은 것이다.
1903년 영국에서 나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무성 영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충실한 각색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영화의 캐릭터들은 원작의 서술과 존 테니얼의 일러스트 속 묘사를 따른다. <앨리스>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 중 하나인 몸의 크기가 변화하는 장면도 최대한 구현해 냈다.
하지만 영화의 상영 시간 문제상 많은 캐릭터가 편집되었다. 또한 시대적 한계로 인해 무성 영화로 제작되어 <앨리스>의 주된 특징인 말장난과 시들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해 원작 그대로의 각색이라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영화는 스토리의 구현보다는 주요 이미지의 나열에 집중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당 영화는 관객들이 움직이는 일러스트, 혹은 ‘활동사진’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하며, 영화는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원작의 연장에 가깝다.
2011년 나온 발레는 느슨한 각색이 이루어졌다. 우선 몇몇 캐릭터의 외형이 일러스트 속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또한 거의 곧바로 토끼굴에서 떨어지며 시작되는 소설과 달리 발레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하기 전 영국에서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진행된다. 영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의 배우가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 역할도 맡아 1인 2역을 수행한 것은 발레의 스토리 상 특이점이다.
또한 말장난과 시가 들어가지 못한 대신 등장인물들의 특징을 춤과 음악을 사용해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하트 여왕은 목을 손으로 긋는 동작을 통해 참수를 표현한다. 그 밖에도 해당 작품은 다양한 소품과 배경, 의상을 이용해 이상한 나라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차이가 비롯되는 가장 큰 원인은 책과 무용이라는 두 예술을 각각 성립하게 하는 요소 간의 차이이다. 활자와 제한적인 시각적 자극을 사용하는 정적 매체인 책과 풍부한 시청각적 자극을 사용하는 동적 매체인 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이질성은 소설과 만화, 책과 연극, 책과 영화 등의 관계에도 나타난다. 기존의 이야기를 이질적 매체를 통해 전달한다는 행위는 각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1951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대중적인 앨리스의 이미지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정신없는 만담과 말장난, 캐릭터들의 소위 ‘미친’ 면모는 영화 전반에서 잘 드러난다. 원작의 시는 영화상에서 노래가 되어 나오기도 한다. 새로운 캐릭터들이 영화에 등장했으며 일부 캐릭터들의 이미지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애니메이션은 전반적으로 원작 텍스트가 그려낸 이미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원작 정신의 측면에서 볼 때, 애니메이션에는 원작을 크게 변형한 부분이 있다. 앨리스는 미친 모자 장수와 3월 토끼를 만난 이후 향한 숲 속 깊은 곳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만다. 그때 앨리스는 멋대로 돌아다니고 좋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제멋대로 행동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노래(Very Good Advice)를 부른다.
이는 아이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담아낸 원작과는 크게 대치되는 메시지다. 영화는 앨리스의 입을 빌려 어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호기심을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보다 좋다는 충고를 던진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것의 미덕에 관해 주장한 것이다.
2010년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또한 작품 정신의 측면에서 큰 변혁이 이루어졌다. 해당 영화는 책뿐만 아니라 위의 애니메이션 또한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원작이나 위의 작품들은 캐릭터 간의 대화, 상황 설정 등을 통해 이상한 나라의 환상적 면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며 작품은 명쾌한 스토리 라인이 아닌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전개된다. 그에 반해 이 영화는 명확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CG를 통해 사실적으로 구현된 캐릭터들과 원작보다 논리성 있는 이야기를 갖춘 영화는, 기존의 <앨리스> 시리즈뿐 아니라 그 각색작들과도 다른 성격의 느슨한 각색을 선보인다. 영화는 앨리스가 현실 세계 및 이상한 나라에서의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각색 과정에서 감독은 명확한 선악 관계를 설정하였고 결과적으로 영화는 위의 애니메이션과 같이 교훈성을 띠게 되었다.
영화 속 앨리스는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영화 속 현실 세계에는 일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앨리스의 언니 캐릭터로 대표되는 현실 세계의 기득권, 혹은 어른에게 순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는 원작 앨리스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무조건 윗사람을 따르는 것보다는 스스로 생각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된 시대의 변화로 인해 메시지도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창작자의 가치관 및 해석, 각색이 이루어지는 시대, 전달 매체 등에 따라 같은 작품에 대한 각색도 천차만별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출처
김윤아 (2011). 우는 앨리스, 불안한 앨리스, 전사 앨리스. 씨네포럼(13), 219-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