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시리즈를 통해 보는 번역
원작의 변형은 각색이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다시 떠올려 보자.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천만 관객의 쾌거를 이루어 냈지만 다른 나라에는 없는, 뜻밖의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바로 영화의 중요 대사 "We're in the endgame now.", "이제 최종 단계에 들어선 거야." 정도로 번역되어야 올바른 이 대사가 “이젠 가망이 없어.”로 번역된 것이다. 이 오역은 영화 결말 부의 뉘앙스를 완전히 파괴해 놓았기에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원어가 아닌 번역을 통해 작품을 접하고 판단하게 된다. 창작자가 의도한바 그대로가 번역본에서 전달되는 것은 이상적이나 언어 간의 차이로 인해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번역가는 원문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내용 일부를 바꿔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그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소설이다. 주인공 앨리스가 이상한 장소에 떨어져 온갖 캐릭터들을 만나고 희한한 일들을 겪는다는 것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이다.
작중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등장인물 간 대화는 논리적 흐름이 아닌, 말장난과 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문장의 표면적 의미 전달뿐 아니라 내재된 요소의 전달까지 신경 써야 하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소설이다.
영미권의 언어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만큼, 완전히 상이한 언어체계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 <앨리스> 시리즈를 작가의 의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주석을 사용하거나, 원문의 단어를 변경해 국어에 맞는 말장난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작품을 번역하였다.
이는 ‘충실성(faithfulness)’과 ‘가독성(readability)’이라는 원칙에 따른 결과이다. 이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번역자의 원문에 대한 비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각 번역자의 해석이 다르기에 같은 글을 두고도 많은 번역이 나온다. 특히 <앨리스> 시리즈는 말장난과 시가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국내에 여러 버전의 번역본이 출간되고 있다.
다음 두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가짜 거북이, 그리핀과 앨리스가 대화하는 부분의 일부이다. 이 대목의 원문과 다양한 번역 예시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원문 1과 원문 2, 번역 1-1과 번역 2-1은 베스트트랜스가 옮기고 2013년 출간된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15권 초판 3쇄에서 인용했다. 번역 1-2와 번역 2-2는 김경미가 옮기고 2010년 출간된 비룡소 클래식 16권 1판 5쇄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원문 1)‘What was that?’ inquired Alice.
‘Reeling and Writhing, of course, to begin with,’ the Mock Turtle replied; ‘and then the different branches of Arithmetic-Ambition, Distraction, Uglification, and Derision.’
번역 1-1) “정규 수업 과목은 뭐였어요?”
앨리스가 물었다.
“우선 비틀거리기와 몸부림치기가 있지. 그리고 자잘한 수학 과목이 있는데 야망, 산만, 추화, 조롱 같은 것들이지.”
번역 1-2) “정규 과목은 뭐였는데요?”
“그야 먼저, 국어로 남말하기와 떼쓰기를 배우고 여러가지 스프학도 배웠지. 더 먹기, 뺏어 먹기, 고프기, 나눠 먹기.”
두 번역 모두 교과목의 의미를 패러디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살리고자 했다. 다만 번역 1-1의 경우는 원문의 단어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것에, 번역 1-2의 경우 실제 과목과 유사한 발음의 단어를 이용한 원문의 말장난을 국어로 옮기면서도 원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것에 집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후자의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위와 같이 일회적인 말장난인 경우는 괜찮겠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지속해서 쓰이는 말장난의 경우 통일성과 상징성을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원문 2)‘… I should say “With what porpoise?”’
‘Don’t you mean “purpose”?’
번역 2-1)“…’ 어떤 돌고래(porpoise)와 가는데?’ 하고 말이야.”
가짜 거북이가 말했다.
“혹시 ‘목적(purpose)’이라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번역 2-2)“…’ 어떤 필기대구를 가지고 가?’ 하고 물을 테니까.”
“‘필기도구’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책의 다른 부분에는 발음의 유사성에 집중한 다른 말장난이 등장한다. 번역 2-1의 경우, 번역가는 괄호를 이용해 주석을 달아 원문 속 단어의 피상적 의미와 말장난을 동시에 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석은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번역문의 가독성을 저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번역가는 가독성보다는 충실성을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번역 2-2의 번역가는 가독성의 원칙을 우선시했다. 이 번역에서는 말장난을 살리기 위해 원문의 의미가 크게 변형되었다. 그러나 원문에서 이 부분에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이 사용되었음을 독자가 짐작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충실성과 가독성 중 어느 한 원칙에 집중하는 것은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음을 위의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어느 번역 방식을 사용할지를 여러 요소를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이때 작품의 내용이나 번역가의 비평만이 번역 방식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책이 아닌 영상 매체 번역의 경우, 주석을 통한 번역에는 무리가 있기에 필연적으로 가독성에 집중하는 번역 1-2 및 2-2와 같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원문)"The young people might enjoy playing with the theme of Café Salmonella and its virulently fishy decor."
한글 자막)"아마도 젊은 친구들은 카페 살모넬라의 테마와 비밀 조직처럼 맹렬한 장식에 장단 맞추며 즐길 것 같군요."
위의 두 대사는 넷플릭스 드라마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 2017-2019)에 나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드라마 속 비밀 조직의 약자이기도 한 VFD라는 약자를 이용한 말장난을 꾸준히 사용한다. 원문의 Virulently Fishy Decor라는 대사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소설도 한국에 번역돼 출판됐다.
소설 번역본의 경우, 번역가는 말장난을 번역할 때 소설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는 번역 2-1과 같은 방법을 택했고 주석을 달아 원문의 말장난을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드라마 역시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옮기는 방식을 택했으나 가독성을 크게 떨어뜨리게 될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대신 VFD의 약자를 사용한 문구가 나올 때 자막에 비밀 조직이라는 단어를 넣는 방법을 택했다.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두 원칙의 타협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상으로 두 개 글에 걸쳐 각색과 번역에 대해 살펴보았다. 각색과 번역에도 나름대로의 원칙들이 있고, 어느 원칙에 집중하냐에 따라 결과의 차이가 생김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퀄리티를 갖춘다면, 어느 원칙을 따랐는지는 선호도의 차이 외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평과 고찰을 겪으며 만들어진 결과물은 모두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일정 이상의 수준을 갖췄다면...
출처
김희진(2010). 문학번역의 충실성 개념 재고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타난 음성적 언어유희의 한국어와 프랑스어 번역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