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진 Oct 17. 2022

앤토니오의 양심 2

정의와 자비의 관점으로 바라본 <베니스의 상인>

 앞선 글의 첫 장면을 통해 유대인이 핍박받던 <베니스의 상인> 속 사회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샤일록의 행동을 비난하던 앤토니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앤토니오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정의와 도덕을 내세우는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고지식한 앤토니오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의 태도는 변한다.



장면 3: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앤토니오


그라쉬아노

목매달아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해 봐라.

그러나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했으니

밧줄 살 돈도 없겠구나.

그러니 밧줄 값은 국비에서 지불해주지.

-윌리엄 셰익스피어,『베니스의 상인, 박우수, 기린원, 2009, pg. 170


앤토니오

공작 각하와 법정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좋다면

그의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지 않고 벌금형만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제가 위탁하고 있죠.

저 사람이 죽게 되면 얼마 전에 그의 딸을 훔친 그자에게

그 재산을 양도하는데 저자가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같은 책, pg. 172


 세 번째로 살필 장면은 샤일록에게 판결이 내려질 때이다. 포셔의 지혜 덕분에 앤토니오는 법적 정의를 지키면서도 살아남게 되었고, 오히려 샤일록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판세가 뒤집힌다.


 사실 앤토니오는 샤일록의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잃은 재산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도 있고, 자신이 싫어하는 고리대금업을 샤일록이 더 이상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앤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처음으로 자비를 베푼다. 그는 장면 1에서 정의에 치우치게 움직인 바가 있다. 이 세 번째 장면의 행동을 앞선 첫 행동과 유사한, 자비에 치우쳐진 행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앤토니오의 이러한 행위는 베니스와 그 자신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는 정의와 자비가 균형을 이룬다. 앤토니오의 양심은 정의와 자비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샤일록을 진정으로 양심적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앤토니오가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재판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법적 정의에 따르면 앤토니오는 처형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샤일록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앤토니오는 영향을 받는다. 자신들은 샤일록을 차별하고 그의 행동을 정의를 기준으로만 판단해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샤일록에게는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샤일록에게 하는 이 요구에 앤토니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Robert Smirke가 그린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포셔

자비란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 지상에 내리는 단비 같은

것이지요. 그것은 이중의 축복입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내리니.

가장 강한 사람이 소유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것입니다.

-같은 책, pg. 157


 특히 포셔가 이중의 축복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포셔는 샤일록을 설득하려 했으나, 막상 설득된 사람은 앤토니오라 할 수 있다. 포셔의 말은 앤토니오로 하여금 자신이 샤일록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었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포셔의 판결 이후 바뀐 재판 모습도 앤토니오에게 영향을 준다. 판세가 뒤집히자, 앤토니오의 친구들은 샤일록을 죽일 것을 주장한다. 사람의 목숨을 뺐는 것은 비양심적인 일임에도, 샤일록과 앤토니오의 친구들 모두는 이를 너무나 쉽게 요구했다. 결국 양심의 상태는 두 측 모두 비슷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앤토니오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정의와 자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초반부와 중반부에 나타나는 앤토니오의 기준에서 보면, 사실 샤일록에게 돈을 빌려 고통받는 사람들도 정의, 즉 법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 것뿐이며 도와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앤토니오는 이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준다. 이러한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 또한 돌아보았을 것이다.


 현대에도 어떤 이를 판단할 때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이들은 많이 있다. 그러한 불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선 글의 장면 2를 통해 앤토니오가 자신이 불이익을 받게 될 상황에서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임을 보았다.


 자신의 친구와 샤일록의 채무자들을 샤일록과는 다르게 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앤토니오의 친구들도 모두 분명히 정의를 어긴 것인데 말이다.


 자신이 그들을 샤일록을 대할 때처럼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차별'과 '자비'라는 두 가지 차이점 때문이었다.


 앤토니오는 그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샤일록에게는 자신의 정의에 따른 엄격한 판단으로 그를 대했다. 이는 앤토니오도 샤일록을 경멸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샤일록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샤일록의 고리대금업 또한 이러한 차별에 박차를 가한다. 채무자들을 힘들게 하고, 부정한 일을 하는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성을 앤토니오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의 과정을 하나하나 거치면서 앤토니오는 자신이 샤일록을 차별적으로 대우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자비를 베풀 것을 웅변하는 포셔의 말 또한 듣는다. 결국 그는 정의를 바탕으로 한 자비를 샤일록에게도 행한다.


 오늘날에도 자신과 다른 이들을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의 차별적 행동을 멈춘 앤토니오의 행동은 현대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도 모범적이라 말할 수 있다. 장면 1에서 본 앤토니오의 행동과는 크게 다르다.


 앤토니오가 자비를 베풀자, 그에게도 이전의 모습에서 탈피한다는 축복이 내린 것이다.



마치며


앤토니오는 극 중에서 몇 가지 사건을 거친다. 그 사건들은 앤토니오에게 시련을 주고 피해를 입히지만, 피해만큼의 보상도 받는다. 금전적인 손해는 앤토니오의 배들이 다시 돌아오며 없던 것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제 앤토니오는 양심을 성숙시켜 자비를 바탕으로 한 정의, 혹은 정의를 바탕으로 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보상을 얻는다.




출처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박우수, 기린원, 2009.

이전 04화 앤토니오의 양심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