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리즈의 ‘로키’를 통해 보는 영화의상
*<토르: 다크월드>, <토르: 라그나로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웅 토르와 대척점에 서 있는 고풍스러운 악당으로서의 로키의 면모를 앞선 글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로키의 캐릭터성은 더욱 다층적으로 변해갔다. 방황하는 탕아, 로키는 어느 한 편에 쉬이 안주하지 않으며 영화에 흥미진진함을 더했다. 이러한 모습은 의상에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는 영화의 시각적 묘사에 기원전 600년경 켈트족의 역사를 참고했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는 원을 기반으로 한 철기문화인 라텐 문화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는 추상화되어 거의 모든 의상의 세부적 요소에 적용되었다. 의상은 아스가르드와 배우들의 환상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의상과 배경은 동화를 이루어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로키의 의상은 미묘한 음영과 질감을 통해 짓궂고 일탈적인 캐릭터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 영화에서 로키는 크게 두 가지 의상을 착용한다. 하나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의상으로, <어벤져스>에서 갑옷 안에 착용한 의상을 기반으로 디자인되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 쓰인 가죽과 같은 일부 디자인 사항은 유지되었지만 의상 요소 대부분이 단순화되고 제거되었다. 이는 나라의 둘째 왕자에서 죄수로 몰락하게 된 로키의 신분 변화와 로키가 무력하게 제압되었음을 표현한다.
감옥에서 나오기 전 로키는 한 차례 더 의상 변화를 겪는다. 바로 로키는 양어머니 프리가의 죽음에 크게 동요한 때이다. 산발이 된 머리 스타일과 맨발은 로키가 크게 절망했고 심리적으로도 궁지에 몰렸음을 암시한다. 로키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이러한 모습은 로키와 토르의 동맹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로키가 토르와 협력을 시작해 감옥에서 나온 이후 로키는 다시 <어벤져스>에서의 의상으로 회귀한다. 관객은 이 익숙한 악당 의상으로의 변화를 통해 로키가 감옥에서 나와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다시 얻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로 인해 관객은 로키가 다시금 토르를 배신하고 공격할 것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악당과의 결투 외에도 이야기에 긴장감을 조성하는 요소가 추가된 것이다. 이 의상은 로키가 앞의 영화에서 목표했던 왕좌를 기어코 차지해내는 영화의 결말과도 연관성을 지닌다.
삭제된 영상이지만 토르를 모방한 <토르>에서의 로키의 캐릭터성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도 있다. ‘Loki’s Coronation Deleted Scene’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로키는 토르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망치 묠니르를 드는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
망토의 어깨 부분에 달린 풍성한 털은 과장되고 연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스가르드의 왕좌를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로키의 모습은 <토르> 초반부의 토르의 모습과 겹쳐 보이며 로키가 가진 인정 욕구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로키는 왕좌는 원할지언정 토르의 방식을 따라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기에 영화에 삽입되었다면 다소 어색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의 결말에서 오딘의 모습을 말 그대로 ‘모방’해 통치권을 얻어내는 로키의 행적을 고려하면 흥미로운 장면임은 틀림없다.
<라그나로크>에서 로키와 토르는 악당 헬라와 싸우던 도중 그랜드마스터에게 지배받는 사카아르라는 행성에 떨어지게 된다. 이 행성은 기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아스가르드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아스가르드는 고풍스러우며 미학적으로 잘 정돈된 반면 사카아르는 기울어진 각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상한 색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80년대 SF 장르를 연상시킨다. 원이나 정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과 마름모 형태가 행성 디자인에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건물뿐만 아니라 사카아르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의 의상의 형태와 문양에도 사용되었다.
사카아르에서 로키가 입은 의상의 문양을 통해서 영화 속 로키의 내면을 느낄 수 있다. 이전 영화의 의상에는 V자 형태의 무늬가 있었던 것과 달리 이 의상에는 대각선 패턴의 비대칭 문양이 있다. 로키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결국 아스가르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 기울어진 선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고 영화의 디자이너는 말한다.
아스가르드인으로서의 로키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또 다른 요소는 심장 부근의 노란 마크이다. 이는 기존 의상에서 목 부분에 있던 U자 형태의 금속이 변형된 것이다.
기존의 의상에서 이어진 요소들은 그밖에도 존재한다. <어벤져스>에서부터 나타난 어깨 갑옷은 <라그나로크>의 로키 의상에도 들어간다. 로키는 이번에도 투구를 쓴다. 다만 투구는 윗부분이 열린 왕관에 가까운 형태로 변했다.
이는 만화책 <X-Men: Asgardian Wars>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결과이다. 디자이너는 정면에서 귀가 더 잘 보이도록 투구를 디자인함으로써 코믹스를 더욱 충실히 구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투구에는 여전히 뿔이 달려 있는데, 뿔은 로키가 그랜드마스터의 주의를 끌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동시에 너무 무겁진 않아 배우가 투구를 쓰고 연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의상의 색깔로는 새로운 색상과 기존의 색상이 모두 사용되었는데, 이 색들은 로키의 행동을 표현한다. 로키가 사카아르에서 생활할 때의 의상은 전작에서부터 지속해서 사용되어 온 초록색이 아닌 남색이며 기존의 녹색 망토가 아닌 노란색 망토를 걸쳤다.
이는 그랜드마스터의 의상과 유사한 색으로, 토르와 아스가르드를 외면하고 그랜드마스터와 어울리는 로키의 행동을 묘사한다. 디자이너는 이러한 색 변화를 통해 로키의 혼란과 아버지 오딘에 대한 애도 또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키는 결국 다시 아스가르드로 돌아가며 기존과 같이 초록색 의상을 입는다. 다만 이때 입은 옷은 이전처럼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아니며 채도 높은 녹색도 아니다. 사카아르에서 입은 것과 유사한 형태의 어두운 녹색 옷은 로키의 환복을 눈치채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고풍스러운 영웅 서사시를 벗어나 스페이스 오페라로 선회한 시리즈의 방향성 변경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극적인 의상 변화의 부재는 사카아르에서부터 이어진 영화의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인 것이다. 의상에 어두운 녹색을 사용한 것은 마찬가지로 초록색을 이미지 컬러로 사용하는 영화의 악역인 헬라와의 디자인적 유사성이 생기는 것을 회피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라그나로크>의 마지막에 로키가 녹색 옷을 입은 것은 장소의 변화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해당 영화에서 로키는 앞선 영화들에서 겪어온 내면의 혼란을 잠재운다. 오랫동안 목표해왔던 왕좌를 차지해보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아왔음을 느꼈으며 형 토르와도 화해했다.
‘아스가르드의 왕’이라는 유형적 지위를 추구하며 시리즈 내내 방황하던 로키는, 마침내 자신이 머물 곳을 가족들 사이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는 아스가르드란 장소가 아닌 사람이라 설파하는 해당 영화의 주제 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인피니티 워>의 로키가 <라그나로크>의 의상을 그대로 입은 데에는, 로키가 이루어낸 내면적 성장을 부각하여 그의 최후에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한 제작진의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로키는 가족에게로 돌아오며 자신의 서사를 영웅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관객이 보아온 로키는 사망했으나, 마블은 캐릭터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회사는 평행세계, 또는 ‘멀티버스’ 속 로키를 시리즈로 끌어왔는데, 다음 글에서 살펴볼 것도 바로 이 로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