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껏 아이는 귀가 전이다. 이제는 초등 고학년 선배가 된 원이를 꽃샘추위가 한창인 주말에 만났다. 마침 주말이라 풍광 좋은 카페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슬며시 나에게 내민 건 하얀 종이다. 이게 뭘까? 사랑의 편지인가. 빛을 받지 않은 것 같은 하얀 고사리손으로 이모의 떨리는 가슴을 두 번 접은 A4 용지가 천천히 다독거렸다. 오, 이런.
우리 원이가 회장 선거에 도전하는구나. 꼬물꼬물 하던 아이가 언제 커서 선거에도 나가고 참으로 대견하다. 조카는 또래 아이답지 않게 유독 말수가 적었기에 깨질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아이였다. 조용히 혼자 해내는 아이가 조카이다. 한때는 혹시 말을 잘 못 하는 건 아닌지 외할머니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적도 있다. 보통 아이란 참새처럼 재잘대며 나부대는 게 일상이 아니던가. 어찌나 호기심과 질문이 많은지 대답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에피소드는 흔하디 흔한 현상이다.
알고 보면 조카는 사려가 깊은 아이였다. 나이답지 않게 자기만의 철학이 있고, 엄마 아빠에게는 재간둥이이며 사랑의 오작교 역할도 톡톡히 한다는 후문을 익히 들었다. 다만, 낯가림이 꽤 있달까. 음전한 것이 정답에 근접하겠다. 한때 큰 슬픔을 두 번 겪었던 전적이 있어 깊은 눈으로 훑곤 하지만, 구김살 없이 악기 연주며,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예고도 없이 작년, 아이는 회장 선거에 도전했다. 당당하게 첫 선거유세에서 친구들의 많은 표심을 받아 회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는 도전할지가 미지수였다.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회장은 수학 도우미, 체육 도우미, 환경 도우미 등 솔선수범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그 경험을 살려 올해도 새 친구들에게 공약을 내 건 봉사 정신과 도전 정신이 투철함에 슬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활짝 펼친 종이 위에 글자가 돋아난다. 또박또박 쓴 정갈한 글씨가 동글하니 예쁘기도 하다. 회장 선거에서 발표하려고 스스로 쓴 공약이다.
‘저는 일찍 등교하여 교실을 정돈하고, 뒷정리로 깨끗한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모두가 어울리는 학급이 되도록 징검다리가 되겠습니다. 저를 선택해 주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기발하거나 인기 만발할 공약은 아니지만, 작년에 했던 것처럼 학급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약속이 뭉근했다. 문구가 괜찮은지 날 살핀다. 엄지 척을 높게 올려주었다. 친구들의 환심을 살 만한 거창하거나 미혹할 문구는 아니지만 학급 회장 선거가 인기투표는 아니니까.
사실 그때 나는 조카가 평소 자주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연상한 거창한 문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속으로 꾹 삼켜 발설하지 않았다. 그 문구는, 아마도 아이나 선생님의 감탄 어린 환호성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아이의 진솔함을 무기로 스스로 도전하여 성취하는 것이 더 조카에게 삶의 자양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와준답시고 어른의 잣대로 훈수를 두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다진 내면의 힘을 믿었다.
기다리던 카톡 알람이 왔다. 사랑해’란 알람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두근두근, 작은 북소리가 갑자기 가슴에서 울린다. 내가 선거 유세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새가슴이 콩닥콩닥하게 하이햇 심벌즈를 두드릴 일인지, 점점 빨라진다. 어디 보자. 어?
‘이모, 아쉽지만 두 표 차이로 회장에서 미끄러졌어요. 부회장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이 학기에 회장 선거에 다시 도전할 거예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원이야. 후보자로 나선 것만 해도 너는 이미 승리한 거란다. 깨끗이 승복할 줄도 알고. 부회장을 거절하는 의지도 표현하고. 이 학기에 이모가 뒤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응원할게. 잘했어!'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산꼭대기 정상에 오른 자가 있을까? 있다는 가정을 세우자면 그에겐 좌절이 없다. 실패할 때 다시 일어선 자는 영광의 참맛의 물을 마실 수 있다. 실패의 끝이 어디쯤인지를 알고 있기에 성공이 더 달콤하지 않을까. 오죽하면 실패는 어머니를 성공에 대입했을까.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는 선거에서 낙선했어도 평정을 유지했다. 상심하지 않았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다음을 노리는 아이로 한 뼘 성장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최근에 나는 어린 조카만도 못한 실패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오히려 조카에게 내가 응원받아야 할 성싶다. 아이의 빛나는 흑요석에 나의 내면 아이가 비칠지도 몰라 내 눈동자를 잠시 눈꺼풀에 감춘다. 실패를 방패 삼아 곧 2차전을 준비해야겠다. 늘 다음은 준비된 자에게 접근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성장을 통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부끄럽지 않게 속눈썹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