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숨은 마음
<흑과 백>
# 발문을 청하다
한여름, 나는 한 통의 부탁을 건넸다. 지도받은 적 있는 교수님께 나의 첫 작품집에 발문을 써 달라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기대를 품고 말했다. 그간 가볍게 몇 번 흘리듯 꺼냈던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래요"라는 간단한 수락을 바랐건만, 교수님의 표정은 묘하게 침묵으로 채워졌다. 반김도 거절도 아닌, 무감에 가까운 그 반응은 실망이라 이름 짓기엔 너무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남겼다. 마치 바람에 흩어진 물안개처럼, 그 감정은 명료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무모할 만큼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문화예술 지원 사업에 지원서를 낸 것이다. 글쓰기라는 외길에서 걸음마를 떼고 걷기 시작한 나로서는 망설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지원 서류의 공란을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의 작은 용기가 불쑥 고개를 든 것이다.
결과 발표 날, 공지된 명단을 훑으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문인 선배들 몇몇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심사평을 읽어보니, 해당 장르 부문에 수많은 이들이 지원했으며 그 경쟁은 치열했다고 했다. 내 글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내가 신청한 A형 부문의 특성 덕분에 운 좋게 선정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짐작은 마치 얇은 종이 위에 그려진 희미한 선과 같았다. 확신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그림자였다.
대학원 방학이 시작되며,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출간일을 기다렸다. 이 시간 동안 미완의 원고를 퇴고하고, 교수님께 발문을 의뢰할 계획이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등에 업고, 나는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틈만 나면 글을 다듬기 시작했다. 뜻밖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지도하던 제자들의 작품이 시의 지원금에 선정되면서 그들의 원고 교정까지 맡게 된 것이다. 한 손엔 내 글을, 다른 손엔 제자들의 글을 들고,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심정으로 달렸다.
블랙 아이스커피를 연료 삼아 그 바쁜 여름의 숲을 헤쳐 나갔다. 성공적이라 말하기엔 부족했지만, 눈에 불을 켜고 매달린 끝에 마침내 인쇄된 내 작품집을 손에 쥐었다. 종이 냄새와 잉크의 무게가 내 가슴을 묵직하게 채웠다. 나는 그 작품집을 정성스레 대봉투에 담아 교수님께 건넸다. "원고지 30매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정중히, 그러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교수님이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치 오랜 갈증이 해소되는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4주가 지난 어느 밤 11시경이었다. 교수님께서 발문을 보내셨다는 문자 연락이 왔다. 노트북 화면을 띄우고 조심스럽게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퇴고할 때처럼 코끝이 시큰거렸다. 작가는 울기보다 독자를 울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교수님의 발문은 예상보다 두 배 길었다. 그 안에는 나를 향한 따뜻한 격려와 날카로운 조언이 공존했다. 그 문장들은 마치 등불처럼 내 앞길을 비추며 동시에 내 안을 휘저었다.
숨을 고른 어느 날 식사 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교수님의 숨은 고심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이 발문을 망설이셨던 이유는 무심함이 아니었다. 그분이 제자들의 발문을 써준 뒤 그들이 떠나간 일종의 징크스가 있었다. 써주고 싶은 마음과 써주자니 망설여지게 만드는 기억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이다. 그 갈등의 무게를 알게 된 순간, 나는 교수님의 침묵이 나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깊은 애정이 어린 뒷면의 얼굴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징크스를 믿지 않는다. 시험 날 아침이면 평소 끓이지 않던 미역국을 끓인다. 누군가는 미역국이 불운을 부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숟가락을 든다. 미역국은 피를 맑게 하고 자극적이지 않아 속을 편하게 만든다. 징크스는 깨라고 있는 것이다. 알을 깨고 새가 날아오르듯, 우리는 두려움을 깨뜨려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 작품집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교수님의 발문은 징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증거였다.
이 여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창작자는 어딘가에서 자신의 취약한 부분과 마주한다.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망설임으로 다가오는 그 그림자를 넘어 우리는 글을 쓴다. 그 글은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한 걸음씩 그러나 단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