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감정을 현상으로 인식할 때가 있었다. 삶의 한 부분이 돼 버린 특별한 감정을, 현상으로 바라보면 편했다. 현상은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 감정에 비해 컨트롤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2017년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인터뷰이인 응급의학과 교수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조금 전 인터뷰를 하다가 비상 호출을 받고 환자에게 갔다.
응급실에서는 기다림에 익숙해야 한다. 사건‧사고‧질병으로부터 몸과 마음이 손상돼 긴급하게 찾는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환자도 보호자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날 인터뷰이인 교수는 전공의와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일이 더 많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그로부터 뉴스에 필요한 간단한 인터뷰 컷을 따기 위해 이렇게 뻗치기를 하는 건 당연했다.
그가 왔다. 더 초췌해졌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전화로 해도 되는 건데.”
“네.”
인터뷰이가 지쳐있다. 이럴 땐 빨리 해치워야 한다. 머리카락은 땀으로 뭉쳤고 수염도 자랐다. 그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인터뷰한 응급의학과 의사가 떠올랐다. 그를 화면으로 본 회사 사람들이 웃었던 기억도. 데스크는 나한테 어디서 노숙자를 인터뷰했냐고 했다. 당시 그 저질스러운 지적질에 대응하지 못했다. 내가 봐도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노숙자가 의사 가운을 훔쳐 입은 모습이었다.
그 일 이후 인터뷰이 누구든 희화화되지 않도록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챙겼다. 가방에서 빗을 꺼냈다.
“교수님, 한번 빗으시죠. 여기 거울.”
그는 시키는 대로 했고 인터뷰도 잘 마쳤다. 그가 잠시 시간 되냐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냐고 물었다. 다음날부터 긴 연휴가 시작돼 다른 일정이 없었다. 눈치 빠른 홍보팀 직원은 영상취재팀에게 식사하러 가자고 했다. 둘이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해줬다.
우리는 병원 내 카페로 들어갔다.
“퇴근이 늦어져 어떡해요. 밤샘 근무하시고. 저희도 돌아가면서 밤샘 근무하거든요. 사무실에서 앉아서 하는 건데도 힘든데.”
“요즘 공황장애는 어떠세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글을 몇 개 봤어요. 기자님이 쓰신 칼럼요. 인터뷰 오신다고 해서 찾아봤죠.”
“우리 회사에 동명이인이 있는데, 공황장애라면 저 맞아요. 음.. 어젯밤 응급실에 공황장애 환자가 왔나요?”
“네.”
그가 밤새 응급 진료한 이들 중 두 명의 공황장애 환자가 있었다.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한 명은 몸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호흡곤란이 심해지는 공황발작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다른 한 명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후 바로 이송됐다. 공황발작을 겪은 여성은 진정제를 투여받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응급 진료로 회복돼 귀가했다. 자살을 시도한 여성은 위 세척 후 안정을 취하고 있으며 생명에 문제가 없는 상태다.
“기자님은 병으로 힘드실 때 어떻게 해요?”
“저는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하면 호흡곤란이 오는데, 요령이 생겼어요. 복식 호흡하면서 물을 마시고 쉬면 금방 나아져요. 웃긴 게 근무처럼 긴장하고 있을 때는 공황장애가 안 와요. 주로 긴장이 풀리는 퇴근 시간이나 집에 있을 때 그래요. 교수님도 혹시 공황장애 있으세요?”
“저도 비슷해요. 가끔 올 때가 있는데 잘 다스리죠. 그런데 기자님이 의학 저널에 기고한 칼럼들 보고 많이 놀랐어요. 용감하세요.”
“저도 이렇게 멀쩡하게 사회생활하고 있고 어쨌든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도 그냥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름도 밝히고 병명도 밝히는 거죠.”
“저는 의사가 되면,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면, 죽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는 나한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차를 마시자고 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의도를 잘 안다. 이럴 땐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설명해도 안 된다. 무조건 공감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논리를 펴도 우선은 들어줘야 한다.
“교수님, 저도 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삶을 놓아버리면 제 인생이 너무 가엾잖아요. 주인 잘못 만난 제 인생이 무슨 죄예요. 제 인생에 책임을 다하려고 사는 거예요.”
“기자님 글을 읽으면서 털어놓고 싶었어요. 언젠가 만나뵙게 되면 말씀드리고 싶었죠. 이렇게 만나게 됐고요.”
“네, 이렇게 만났어요. 이런 얘기는 직군도 다르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편할 수 있어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살고 싶어서 살면 좋겠지만, 그게 잘 안되어도 그냥 살아야 해요. 살다 보면 살고 싶은 마음이란 게 들 수도 있고, 안 든다고 해도 괜찮아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행복하지 않아도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 돼요. 저는 오직 하나, 이 생각을 하며 버텨요. 우리가 세상에 온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뭔지 꼭 알아야 해서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보려고요.”
“내가 세상에 온 이유, 그러니까 살아야 하는 이유네요.”
“네. 어떻게든 살다 보면, 먼 훗날 알게 될 거 같아요. 내가 왜 세상에 왔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기자님, 저는 학창 시절부터 죽고 싶은 생각에 힘들었어요.”
“교수님은 의사니까 의학적인 측면은 빼고 우리 이야기해요. 저는 이걸 기질과 성향, 환경 등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자살 충동은 살아온 환경과 경험, 특히 어렸을 때 받은 사건‧사고로 인한 충격과 상처에, 본인의 성향이 종합된 거라고 봐요.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요인도 포함되겠죠. 이건 교수님이 의사니까 잘 아실 거라 봐요. 교수님과 제가 느끼는 자살 충동은 보통 사람들이 큰 사건으로 인해 급성으로 중증 우울증에 걸렸는데 치료받지 않아 충동에 시달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에요. 그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를 잘 받으면 우울증도 낫고 충동에서도 자유로워져요. 일시적 에피소드에 의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만성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그걸 그냥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게 관리하기 편해요. 그 근거가 이겁니다. 급성 중증 우울증 환자들은 치료받지 않으면 일상이 파괴되는데,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잖아요. 일상이 지옥이지만, 할 거 다 하면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니까요.”
“그렇죠. 죽고 싶어서 마음은 지옥인데, 환자를 살리고 있어요. 모순이죠. 출근할 때 교통사고가 나길 바라면서 집을 나서요. 그런데 병원에 와서 응급 환자들 보면 살리고 봐야 한다는 마음뿐이에요. 퇴근해서 집에 가면 다시 어둠에 갇히고요.”
“교수님 말씀 속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죽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고 책임감 가지고 일하는 마음도 진심이에요. 두 개 모두 존중해줘야 해요. 저는 언제부턴가 그런 충동을 받아들였어요. 자살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런 마음을 존중하는 거죠. 내 삶이 그렇구나. 내 인생이. 내 마음이 그렇구나. 이런 마음을 달래는 거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솔직히 서글플 때도 많아요. 사람들은 제가 이런 고통을 받는지 상상도 못 해요. 겉에서 보면 지극히 멀쩡하니까요. 두 개 모두 진실이라고 봐요.”
“저는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갔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외면하면서요.”
우리는 이야기를 길게 주고받다가 잠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서로에게 한 말을 곱씹듯이. 그의 목에 걸린 신분증이 보였다. 사진이 아마도 의대 졸업 때 찍은 것 같았다. 그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말했다.
“이거 의대 졸업할 때 찍은 거라 지금이랑 좀 다르죠?”
“전형적인 의사 이미지예요. 선하면서 성실해 보이고 신념이 느껴지는 얼굴. 의대 졸업하실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치시잖아요. 기억나세요?”
“네. 졸업식 때.”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이런 구절 있잖아요. 맞죠?”
“네. 아시네요?”
“알아야죠. 저희는 의사를 상대해야 하니까요. 인류봉사, 결국 사람 살리는 것이고,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고요. 그 인류봉사에 교수님 자신도 넣어보세요.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실행에 옮긴 이들을 교수님께서 살리시는 거잖아요. 그게 히포크라테스 선서 때 외치던 인류봉사고요. 교수님 자신도 교수님께서 살리셔야 합니다. 교수님도 저도 인류에 포함되잖아요. 우린 동시대인.”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를 살린다?”
“네. 만약에 교수님께서 그런 충동을 실행에 옮겨 응급실로 이송된다면, 전문의가 교수님을 살릴 거예요. 아까 말한 인류봉사죠. 저는 교수님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저한테 차를 마시자고 한 거고요. 바람직한 시그널이에요. 교수님은 시도하지 않을 거니까 자기 자신을 살릴 수 있어요. 두 개의 마음 모두를 존중해 주시면 어떨까요. 저처럼요.”
“두 개의 마음을 모두 존중하라는 거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자신이 나를 살리라는 것도요.”
“그래도 교수님은 살고자 하는 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났고요.”
그는 냅킨을 꼬고 있었다. 손톱과 손끝 사이에 소독약이 스며들어 있었다. 붉은 기 도는 황색의 소독약은 크고 작은 상처를 봉합할 때 쓰인다. 긴박한 상황에선 쏟아붓는다. 수술장에서는 메스를 들기 전 수술할 부위에 칠해진다. 나의 마음도 꺼내 이 소독약에 담가뒀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새살이 돋게 해주는 약. 새살이 나면 칙칙한 소독약 색깔은 사라지고 아기의 양 볼처럼 복숭아빛으로 물든 마음.
“홍보팀에서 들었어요. 글을 무척 잘 쓰신다고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한다면서요. 책을 내시는 게 어떠세요?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쓰셔도 좋을 거 같아요.”
“기자님은 글을 쓰세요?”
“일기 수준이죠. 교수님께서 출간에 집중하면 여러모로 좋을 거 같아요. 지금의 고민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죽고 싶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요.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건 인정한다는 겁니다. 글을 쓰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 현상으로 보인다고요?”
“네. 현상이죠. 어쩌다 죽고 싶다면 이게 감정으로만 볼 수 있겠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삶에서 뗄 수 없는 상태라면 이건 현상이라고 봐야 할 거 같아요. 교수님이나 저나 죽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일상이 마비된 건 아니잖아요.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그 결과, 감정이든 충동이든 두려워하지 말고 정면에서 마주하고 받아들이고(인정하고) 관리하자는 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정면에서 마주한다는 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죠. 글을 쓰면 뭐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물론, 죽고 싶은 마음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도라면 빨리 정신과 의사를 만나야 하죠.”
“말씀 들으니까 정리가 되네요.”
우리는 동질감 같은 걸 느꼈다. 일종의 전우애.
“꼭 책으로 내세요. 저는 하루에 몇 시간만 병원을 드나들어도 할 얘기가 많은데, 교수님께서는 상주하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생사의 경계선인 응급실에서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모든 게 스토리인데요. 어젯밤만 해도 살린 사람들이 여럿 되잖아요. 이런 경험을 글로 승화시켜 주세요. 그래서 이제는 글로도 사람을 살려주세요. 그러면 교수님도 살고 싶어질 거예요. 설사 그런 마음이 안 든다고 해도 어때요. 지금처럼 살면 되죠.”
“책을 준비하면 변화가 생길 거 같습니다.”
“응급실에선 급성기 환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라포르가 형성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특히 더 마음이 가는 환자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아무래도 자살 시도자들이죠. 한번 시도한 사람이 또 오는 경우도 꽤 돼요. 몇 번 시도하다가 진짜 죽는 사들도 있고요. 자살 시도자가 응급실에서 회복한 뒤 정신과 외래를 다니겠다고 하면 마음이 놓이는데, 그냥 가버리면 불안해요. 시도한 사람을 살려놓으면 반응도 다양해요. 멱살부터 잡으면서 왜 살렸냐고 하는 분도 있고 죄송하다며 살려줘서 고맙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어떤 분은 살려줘서 고맙다고 하고 며칠 뒤에 자살 시도로 이송됐는데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살려줘서 고맙다고 한 건 분명히 진심이었어요. 그런데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거죠. 너무 가슴 아파요.”
“교수님 가슴 아프시죠? 우리도 그렇게 죽으면 누군가가 그리 가슴 아파해요. 그러니까 살아야 해요.”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훗날 병원 관계자에게 들었다.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 중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이들에게 그는 치료비를 대신 내주는 일이 꽤 있었다. 자살 시도 같은 자해의 경우 치료받을 때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많은 돈을 내야 한다.
그는 출간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글로써도 사람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 당 환자 수가 가장 많은 응급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료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만큼 임상 경험이 많은 장점(?)을 살려 논문도 꾸준히 내고 있다. 지금은 예전만큼 그 생각이 들지 않고 감기에 걸리듯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살아내겠다는 그의 말에서 희망을 본다. 자살 충동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살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희망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이 글은 자세히 쓸 수가 없었습니다. 취재원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기에. 의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 중 일부를 담았습니다.◆
-(끝)-
https://youtube.com/shorts/BwCTyBmnHX4?si=gOcp0o4ERim-t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