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만 많은 게 아닌
보부상. 예전에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을 뜻했지만 이젠 별의별 물건을 다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사실 스스로 느끼기에 내가 그렇게까지 보부상이라 자부하진 않는다. 나보다 너무 더한, 손톱깎이까지 가지고 다니는 사람, 마스크를 종류별로 챙기는 사람 등의 케이스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보부상이라 말하고 남들에게 보부상이라 칭해질 정도는 된다. 내 가방엔 내가 쓰는 날이 몇 달에 한 번 손에 꼽히는 물건들이 상당히 많다.
안약 있는 사람? 나. 두통약 있는 사람? 나. 생리통약 있는 사람? 나. 손소독제 있는 사람? 나. 라섹을 했는데도 안경닦이가 있고, 립밤을 안 바르는데도 가지고 있고, 사탕은 기본 두세 종류를 갖고 다닌다. 가방은 언제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또 뭘 넣을지 모르니까. 요즘 많이 들고 다니는 파우치형 가방은 절대 안 될 일이다.
사실 그렇게 보부상이라 자부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까지 부지런하거나, 섬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필수 파우치에 있는 락타아제(유당불내증 약)는 동생에게서, 항상 들어 있는 핸드크림은 각종 지인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내가 들고 다니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챙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지도 않다. 내가 튼튼했다면 아이패드는 항상 내 가방 안에 있었을 것이고 항상 이어폰 대신 헤드폰을 갖고 다녔을 것이다. 자잘한 것도 더 많아졌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목도리도, 혹시 모르니 우산도, 혹시 모르니 양말도, 휴지도, 물티슈도, 반창고도, 두통약과 생리통약과 락타아제 외에 다른 약이나 연고도, 노트와 펜도.
보부상이라면 알겠지만, 간혹 찾아오는 ‘마침 갖고 있어!’의 기쁨 때문에 우리는 이 짓을 그만두지 못한다.
1. 생각도?
언제 필요할지 몰라 챙겨두는 물건처럼, ‘언젠가 꺼내쓸’ 생각도 한가득이다. 그런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간혹 활자가 머릿속에 넘쳐날 때가 있다면 바로 그때다. 그런 순간이 책을 읽다가 찾아오면 잠시 책을 덮고서 내게 찾아온 생각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것들을 급히 잡생각 처리봉투에 넣어 내보내고 책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전자를 고르게 되는 날이면 난 공책과 펜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미친 듯이 후회한다. 그날은 카페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짐을 여기 다 놔두고 편의점에서 메모지와 펜을 사 올지 말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핸드폰 하나면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대에 무얼 이리 고민하나 싶겠지만, 때로는 꼭 손으로 써야 할 것 같은 생각도 있기 마련이다.
그 탓에 내 메모는 여기저기 중구난방이다. 갖가지 노트의 세 장 정도씩만 차지하고 있는 생각들이 있고, 핸드폰 메모장에 들은 생각이 있고, 아이패드 메모장에도 몇 개, 블로그 비밀글로도 몇 개가 있다. 거기에 잠시 보부상 마인드를 끼워보자.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어?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것도 하나 있다. 바로 초등학교 때 나름 꼬박꼬박 쓴 일기장 40권이다. 그렇게 많이 해도 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게 기록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콩떡이를 입양했던 당시, 콩떡이 때문에 바빴음에도 왜 그 순간들을 기록하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 옮겨 적지 못한 게 아쉬웠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메모를 뒤적이고 일기를 넘기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어린 시절 40권짜리 일기는 무려 대학원 과제에도 도움을 주었다.
2. 생각도.
물건이 많듯이 생각도 많다. 생각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고 애를 써서 묶어놓고, '마침 내가 갖고 있어!'와 같은 순간에 찾아낸다. 요즘엔 챗GPT에게도 그런 역할을 분배했다. 내가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고 찾아보니 결과가 이랬지, 한다. 아쉽게도 그렇게 정리정돈을 잘하지는 못하는 성정 탓에 노트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 남이 보면 안 되는 글도 여기저기 나눠져 있다.
우울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지만 우울할 땐 내 우울도 쓴다. 형태 없는 것을 명확하게 만들어서 활자로 빚는다. 그럼 언젠가의 내가 거기에 반박한다. 그렇게 언젠가 쓸지도 모를 나의 생각. 그렇게 모으고 모으다 보면 공통된 하나의 커다란 형질이 보여, 또 그것에 대한 생각 꾸러미를 한편에 모아놓는다. 대부분은 무의식 속에 묻어져 있지만, 내 머릿속은 정리 안 된 노트와 갖가지 메모와 포스트잇이 가득한 방 같다. 언젠가 쓸 수 있을까 싶은 꿈 얘기, 버스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생각들, 키워드만 나오면 언제든 발사될 준비를 하고 있는 말들까지.
마침 내게 이런 생각이 있었어!라는 감각은 나를 표현할 때 얼마나 소중해지는지 모른다. 물건의 보부상인 내가 그렇듯이, 생각의 보부상인 나는 그 감각 때문에 생각 모으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물건과 다른 점이라면 무한정 넣고 다닐 수 있다는 것. 메모처럼 어딘가에 옮겨놓아도 바로 보고 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보부상답게 아직도 많은 생각들을 가방 안에 넣고 또 넣는다. 과연 이런 생각까지 어딘가에 쓰일까? 싶다가도, 마침 내가 그 생각을 했었어! 같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동시에, 물건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한 것처럼 더 많은 생각을 가지고 다니기 위해 머릿속의 여유를 넓혀가면서. 바로 메모할 수 있다는 신문물의 도움을 받아 아직 풀지 못한 것들과 쓰이지 않은 마음들을 들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