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프롤로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책이 있다.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전이다.
오랜 기간 동안 명작으로 자리 잡은 고전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시대를 관통하는 깊은 울림을 주는 진정성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야기 속 주인공의 판타지와도 같은 스토리가 내 삶 안으로 파고들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만 거꾸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이 영화와 같은 일이 우리 엄마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움직이는 종합병원’
엄마는 예전부터 여기저기 아픈 부위가 참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아픈 곳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엄마는 종합병원의 거의 모든 진료 과를 섭렵할 정도로 병원과의 친분을 유지하며 살아온 열성 환자였다.
당뇨 때문에 거의 20년 가까이 다니는 내분비내과는 기본이요, 평소 위가 약하고 간수치가 높아서 소화기 내과도 정기적으로 다녔으며, 호르몬 이상으로 몸이 아파 산부인과를 수시로 다니다가 결국 자궁에 혹이 생겨 수술까지 했으며, 유방암에 걸려 수술 후 항암과 방사선과 약 처방 등으로 5년 이상을 꼬박꼬박 외과에 다녀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문제가 생겨 피부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 심지어 성형외과까지 다녀야 했으며, 몸이 춥고 시리면서 땀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흐르는 원인모를 병에 걸려 결국 정신건강의학과까지 다녀야 했다. 그렇게 엄마는 자율신경계를 조절하는 약을 처방 받으며 원인모를 고통과 싸워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적도 있다.
그때 정신과 병동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는데, 폐쇄 병동이 아닌 일반 병동이라 그런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음산한 곳은 아니었다. 엄마처럼 육신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게는 불면증 환자나 신경이 예민한 환자들이 많았다.
여하튼 엄마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병원을 다녔으며, 그곳에서 처방해주는 한 움큼의 약에 의존하며 생을 이어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단골 멘트는,
“만신이 다 아프다.” 였다.
그러다 보니 맞는 약을 찾기 위해 숱하게 병원을 옮겨다니기도 했다.
약에 내성이 생긴 건지, 아님 통증이 옮겨 다니는 건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녀봤지만 엄마에게 딱 맞는 명의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운전을 하게 되면서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건 오롯이 내 몫이 되어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엄마의 운전기사였지, 보호자는 아니었다.
운전을 해줬으니 차비 대신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딸에 불과했다.
그러던 내가 하루아침에 엄마의 보호자가 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유독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당뇨 약을 받기 위해 늘 가던 병원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병원 가자마자 혈액 검사를 했고, 2시간이 지나 검사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에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몇 마디 의례적인 안부를 물은 뒤 처방전 하나 써주고 끝났을 일이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의사 선생님이 평소와 다르게 나를 향해 물었다.
“오귀리씨 보호자 분?”
내가 딸임을 밝히자 따로 할 얘기가 있다며 엄마를 먼저 내보냈다.
뭐지? 이 불길한 기운은?
불안한 듯 눈만 끔벅끔벅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조용히 말했다.
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게 나왔으니 빨리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
나는 귀를 의심했다.
엄마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병에 걸릴 리가 없잖아!
그렇게 스스로 되뇌였건만, 진료실 밖으로 나온 내 손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머릿속이 화이트 아웃이 되어버렸다.
- 의사 선생님이 뭐래?
의사랑 무슨 말을 했냐고 묻는 엄마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 거 아니라고.
간신히 누르고 있던 내 안의 감정이 소리쳤다.
뭐? 별 거 아니라고? 엄마가 백혈병일지 모르는데 별 거 아니라고?
심장이 요동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내 불안한 감정을 들킬 순 없었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대학 병원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사정을 얘기하며 최대한 빠른 시간에 예약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병원에 무균실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화가 났다.
백혈병 의심 소견을 받았다고 했지, 아직 백혈병을 진단받은 것도 아닌데 벌써 백혈병 환자 취급하는 직원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긴말할 것 없이 바로 전화를 끊고 백혈병 치료로 유명하다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유명 병원답게 통화 대기 시간이 길었다. 참고 기다렸다. 언젠간 받겠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근데 무책임하게도 그냥 끊겨버렸다.
그들이 전화를 받아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그래서 다른 대학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얘기하니 고맙게도 다음 날 바로 혈액내과로 예약을 잡아줬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정확한 진단명을 들을 수 있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
이 이야기는 백혈병 진단 후 점차 아이로 변해가는 엄마와 하루아침에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던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다.
엄마가 쓰는 육아 일기가 아닌
딸이 쓰는 육모 일기.
과거 엄마가 어린 날 돌봐왔듯 앞으로는 내가 늙은 엄마를 돌봐 드려야 한다.
백혈병 진단 이후 엄마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장 난 시계는 급속히 엄마를 아이로 바꿔버렸다.
보호자가 없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아이가 되어버렸다.
갑자기 미운 일곱 살로 나이가 뚝 떨어지더니, 여섯, 다섯, 넷, 셋... 하루가 다르게 쭉쭉 내려갔다.
쑥쑥 성장해 가는 아이와 달리 엄마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엄마가 내 유모차를 끌어줬듯 이젠 내가 엄마의 휠체어를 끌어줘야 할 때다.
엄마가 내 기저귀를 갈아줬듯 이젠 내가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할 때다.
엄마가 내 입에 밥을 떠 넣어 줬듯 이제 내가 엄마 입에 밥을 떠 넣어줘야 할 때다.
역할극이 시작됐다.
이제부터 내가 엄마고, 엄마가 내 딸이다.
그렇게 거꾸로 흐르는 엄마의 시간 앞에 난 엄마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