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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Oct 18. 2024

"정말 싫다."

- '부' 그리고 '모' -


무심코 마주한 책의 한 구절이나 누군가 우연히 낸 말 한마디에 애써 묻어두었던 암울이 삽시간에 몰아쳐선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순간이 있다. 대어를 줄줄이 낚듯 비슷한 것들을 엮어선 지우려 애썼던 것들이 속절없이 쏟아져 나오고, 성난 파도처럼 거칠게 휩쓴다.


오래도록 곱게 가다듬었던 것들은 한순간 형체고 마음마저 분실한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을 모르겠으니.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게 성난 복어처럼 내 안을 부풀려 시커멓고 못난 것들을 가둬둔다.


서툴 곰삭힌 것들을 품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니와 본래의 나도 당돌하거나 억세지 못하니, 그럴 때면 숨 쉬는 일마저 고되어 눈도 감지 못한 채 눈물이 흘렀다. 소리 낼 기운마저 잃었다.

  




"나는 정말 싫다."

오랜만에 친정을 방문했고, 또다시 잠들지 못하는 캄캄한 밤, 사랑하는 당신이 말했다. 당신 곁에 있는 그가, 당신만큼 내가 사랑하는 그가 참으로 싫다고.


온종일 같이 지내는 일에 지쳐 그런가 이제는 숨쉬기도 버겁다고. 구급차를 부르려 했다고. 어느 날엔 가장 높은 곳을 찾아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스무 해 전 어느 , 당신이 숨을 쉬지 못해 내가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왔던 일을 기억하냐고 물어왔다. 엄마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는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맘을 잃은 나는 이제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부모님을 사랑한다. 한때는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사랑하는 당신과 사랑하는 그 덕분에 버텼다.



한 번 '부모'라는 단어가 내겐 하나의 모습이었던 적이 없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세밀하게 둘로 쪼개어진 단어. 분명 음절과 음절이 붙어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하게 새겨진 실금을 따라 억지로 풀질해 붙여놓은 글자.


풀질해 놓은 곳을 호호 불어가며 다시 붙이고 달래보아도 결국엔 붙여내지 못했다. 그러기엔 풀의 힘이 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탓에 풀이 버쩍 말라버려 심심했던 기운마저 잃어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 하필 그 시작이 내가 사랑하는 그이 때문이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반으로 뚝하게 잘라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싶다. 싸늘하게 식어 버려진 것들이나 뜨겁게 끓어 넘치는 분노와 같이 극단에 치달은 것들은 모조리 가져와선 대신 꿀꺽 삼켜버리싶었고. 


미약한 풀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둘, 부와 모, 한때는 내 삶의 전부나 이유였던 그들이 서로를 겹도록 싫다고 눈물로 고백하고 무한히 고백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제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당신 곁을 떠나온 지금도, 당신처럼 부모라는 자리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축축해져 버린 탓에 당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적셔버릴 것만 같았다.



수도 없이 들어본 문장이니까, 그저 권태로운 문장일 뿐이라며 꾸역꾸역 암기하듯 되뇌었다. 축축해진 마음을 툭툭 털고선 무심히 병원을 권했다. 마음이 극단에 가있을 땐 아무리 돌려보려 애를 써도 쉬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기에, 켜켜이 묵은 당신의 마음에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가만히, 예사로운 척 공허한 당신 마음에 대고 소리 내었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아니 이제는 편안했으면 좋겠으니까.



일 년에 겨우 두세 번, 우리가 마주할 때 당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면 나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이 부모님 각자의 공간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지내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당신의 눈 속에 반짝거리는 눈물방울이나 비밀히 젖어드는 축축한 원망 같은 것들이 당신 마음에 진실로 부재하길 바랐고. 당신 마음속에 당신 말고 아무것도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여전히,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비우고 나우리가 만나서 함께 맞는 햇살이나 서로의 향기 그 자체만으로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순간의 사소함에도 행복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붙여 감히 소리 낼 수 있을까. 부디 당신 마음속에 깊고 짙게 뿌리내린 원망이나 슬픔 따위가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 좋겠다.



아빠를 사랑했고 몹시 사랑한다. 엄마와 같은 부피와 같은 무게로. 그럼 아빠도 사랑한다는 문장이 더욱 알맞은 건가. 그를 미워하는 당신 앞에서는 소리 내지 못했다.


그렇게 내게 어떤 사랑은 오래도록 비밀이었다. 


친정에서 돌아와서 언제나처럼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며칠간 미뤄두었던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는 미뤄둔 잠을 청했다. 오래도록 깊게 무의식에 가닿고 싶었다.





'좋다'와 '슬프다'는 공존할 수 있을까.


물리적인 거리나 현실적인 상황에 갇혀 일 년에 두세 번 부모님만난다. 남은 생의 기간을 어림잡아 우리 만남의 횟수를 가늠하고 나면, 귀여운 모양새를 한 숫자들이 한없이 미워진다. 


우리가 만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리고 당신을 꼭 안아 숨겨진 마음의 소리를 전해 듣고 나면 한없이 '슬프다'. 두 단어를 양팔에 가득 안고 다음에 만나러 가는 일은 그만 두려워진다.


'좋다'와 '슬프다'는 둘의 모습처럼 함께 할 수 없는 건가.



조그마한 당신의 방에서 당신은 어떤 숨결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무엇이든 좋으니, 그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마음대로 부리기를. 당신의 마음 안에 그도, 나도,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없기를 바란다.


따스함에 붉게 물든 날도, 두근두근 노랑빛의 날도, 파랑파랑 시원하게 숨 쉬는 날도 충만하게 보내고 나서 만나자. 당신을 만나 꼭 안아선 당신 마음에 담아둔 무지갯빛 날들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나는 좋다.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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