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고 달 뜨고, 달 넘어가고 해나듯이

십 대와의 동거

by 영웅

식탁 위에 책 펼치고 앉아 우리는 뭐가 그리 화가 나 있을까.

책만 펼치고 앉으면 우리는 왜 그리 날이 서있을까.

첫째도 뾰로통, 둘째도 뾰로통, 덩달아 나도 뾰로통


영어 지문 한 번만 더 들어보자는데

작은 주먹으로 문제집을 쿵 치는 첫째와 귀를 막는 둘째

고작 집에서 영어문제집 두세장

그걸 못 참는 첫째와 둘째에게 드는 이 감정은


한 문제만 더, 하나만 더, 하고 있는 나의 처량함인지

그 마음도 몰라주는 아이들에 대한 서운함인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이 실랑이에 대한 막연함인지

언젠가 쯤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불안함인지


첫째의 주먹 쾅, 둘째의 귀 막음에

또 어른인척을 멈추고 터져버렸다.


"아 그래 됐다, 듣지 마"

흘러나오는 영어 지문 오디오를 멈추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자리에 더 있다가

폭탄이 터져버린 듯 터져버리겠다 싶었다.


침대에 누웠다.

고작 30분, 나도 지친다.

즐거운 주말 아침,

아침밥도 맛있게 차려냈고 비는 추적추적 오고

딱 그것만 하면 즐겁게 마음 편히 할일 한 것처럼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30분에서 1시간 그것만 하면,


잠이 스르르 들락 말락 한다.

아이들은 고단새 문밖으로 낄낄대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까지만 하고 방으로 숨어 들어오길 잘했다.

우리 모두 눈물까지 안 흘렸으니까.

잘 참았다. 그래도 화난다.

여러 자아들이 내뱉는 생각을 머릿속에 뒤엉큰채

잠이 스르르 들락 말락 한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방문이 활짝 열렸다.


둘째가 후다닥 먼저 뛰어와 안긴다.

"엄마 미안해, 엄마가 우리 좋으라고 틀어주는 건데 귀 막아서 미안해"

첫째는 멀찍이 서서 말한다.

"엄마 우리가 미안해, 다음부턴 잘 듣을게"

여기까지 좋았다. 웬일인가 싶었다.


"엄마 우리가 엄마 기분 풀라고 귤까놨어"

그 말을 듣고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이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귤? 설마 그 식탁 위에 그 귤? 설마 그 귤을 다 까놨을까, 그 많은 귤을 다 까놨겠네, 다 까놨겠다'

갑자기 힘이 사라졌다.

그 귤을 어떡하지 생각만 들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배워온 육아지식은 점점 잊히고 내 감정만 앞선다.

육아 서적에는 이럴 때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아이고~ 그 귤을 다 까놨어!? 정말 맛있겠다. 맛 좀 볼까?

음, 맛있다! 그런데 이 귤을 엄마는 너무 배불러서 다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네,

첫째와 둘째가 까준 소중한 귤, 다음부터는 엄마 먹을 수 있을 만큼만 한 개 두 개만 까줄래?"

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마흔을 앞두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고~ 그 귤을 누가 다 먹으라고, 그 귤을 다 깠어?"

라고 말했다.


첫째는 또다시 토라졌다.

"엄마는 우리가 엄마 생각해서 까놨는데 됐다 됐어, 내가 다 먹으면 되잖아!"

첫째가 방을 나가 버린다. 둘째는 누나가 나서니 따라 나선다.


계속 누워 생각한다.

육아지식을 잊고 대답한 나를 탓해보기도

초등학생이 된 어른답게 귤 걱정을 하는 나를 몰라주는 아이를 탓해보기도 하다가

방을 나섰다.


식탁위로 동그랗고 납작한 플라스틱 접시 위에

몇 조각 남지 않은 귤 조각들이 이어져 입꼬리를 축 내리고 슬픈 얼굴 모양새를 하고 있다.


"흥! 아까는 웃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어!"

첫째가 말하며 첫째의 방으로 가버린다.

둘째는 앞에 서서 "엄마 우리가 귤 많이 먹었어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역시, 내가 제일 어린 마음이다.


첫째와 둘째의 이름을 부르며 말한다.

"미안해 얘들아, 이상하게도 화나는 마음은 손바닥을 휙 뒤집듯 금새 나타나는데,

감사하고 고맙고 즐거운 마음은 바로 생길 적도 있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집어져서 나타나,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려, 귤 까준 마음이 고마웠는데, 그걸 고맙기까지 입 밖으로 내미는데 시간이 걸렸어,

이렇게 귤을 먹는데 시간이 걸렸어"

"아~ 해지고 그다음 달뜨고 그렇게 천천히 시간이 걸리는구나?"

둘째가 말했다.

"그래 맞아!, 해지고 달 뜨고, 달지고 해나듯이 그렇게 서서히 고맙고 즐거운 마음이 돌아와, 그렇게 됐어 그래서 그랬어, 고마워 귤 맛있다!"


귤이 달았다.

결국 다 먹었다.

다 먹을 귤을 또 먼저 걱정했다.


해지고 달 뜨고, 달 넘어가고 해나듯이

우리는 그렇게 느리게도 결국 돌아오고


그럼에도 또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을 쓸어낸다.

결국 그 많은 귤도 다 먹어 놓고서는,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