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와의 동거
"얘들아, 우리 당분간은 집에서는 공부하지 말자."
서안이는 1학년부터 5학년 2학기가 된 지금까지 저녁마다 집에서 문제집을 풀었다.
수학한 장으로 시작해 수학한 장 영어 한 장,
초등학교 3학년 서율이는 6살 적부터 누나 공부하는 시간에 맞춰 문제집을 풀었다.
하루 한 장 문제집을 서안이는 간단히 해내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고, 화도 내고, 마음의 생채기를 잔뜩 얻고서야 끝나는 공부시간.
월수금 수학한 장, 화목토 영어 한 장으로 줄였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월수금 수학 세 문제, 화목토 영어 한 장으로 줄였다.
그래도 여전히 끝은 눈물바다였다.
모든 문제집을 접자고 말했다.
"그러다 우리 인생 망하는 거 아니야?"
아이들은 내가 화나서 내뱉는 줄 아는지 반기기보단 반감을 가졌다.
이미 아이들도 마음 한편 알고는 있다.
공부가 싫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을.
"망할지 안 망할지 그런 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잠시 쉬어가는 것도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첫째가 말했다.
"나는 할래!"
둘째가 말했다.
보통의 저녁, 퇴근하고 바삐 저녁을 차려내고 아이들 공부를 봐주다 시계를 바라보면 시계는 저녁 9시 저녁 10시를 가리키곤 했다.
가정 내 무공부를 선언한 첫날 저녁.
저녁 7시를 알리는 시계부터 저녁 10시를 알리는 시간은 제법 천천히 흘렀다.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아이들 말대로 정말 이러다 인생이 망하면 안 되니까.
이러다 정말 인생이 망하면 어떡하지?
'얘들아, 엄마도 겁난다' 속으로 생각했다.
서안이는 아주 오랜만에 삐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가정 내 무공부 둘째 날,
"엄마 우리 배드민턴 치러 갈까?"
저녁을 차리는데 서안이가 말했다.
"그럴까? 좋지!"
우리 가족에게 새로 생긴 여가시간,
배드민턴 채를 옆에 끼고 아이들과 나섰다.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치고
여름 지나 바로 겨울이 올는지 날이 찼다.
너 한번 나한번 처대던 서안이 서율이는
서로가 하는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다.
서안이가 공을 땅에 떨어트리면 서율이도 한번 떨어트리고
서로 공을 주우려 하지 않으면서 치려고는 했고,
서율이가 실수하면 서안이도 일부러 실수했다.
얼굴은 점점 뾰로통 해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 그렇게 싸울 거면 이제 그만해"
내 말은 들리지 않는지 계속 공은 바닥으로 내쳐지고
둘의 얼굴은 더 일그러지고 입으로는 짜증을 계속 내뱉었다.
'네가 먼저 그랬잖아'
'누나가 먼저 그랬잖아'
"엄마는 먼저 가야겠다!"
나의 어린 마음이 또 튀어나왔다.
둘째가 얼른 나를 따라나섰고 첫째는 혼자 연습을 할 거라며 벤치로 가더니 앉아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다시 나는 어린아이들을 달랠 마음 한편 못 내준 채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둘째가 계속 뒤를 쫓아왔다.
"엄마 같이 가. 엄마 좀 천천히가"
그냥 걸었다. 빠르게 걸었다.
"엄마 누나 지금 위험한 시간인데 누나 혼자 두고 와도 돼?"
"몰라, 누나도 혼나봐야지, 너 괴롭혔잖아? 누나가 먼저 했다며?"
"그래도 지금 너무 캄캄하고 위험한 시간인데"
"맨날 너 괴롭히는 누나, 혼 좀 나보라지, 얼른 집에 가자 춥다"
서율이가 계속 걱정되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괜찮다는 얼굴을 하고 서율이를 보고는 엘리베이터 층을 한번 본다.
엘리베이터가 우리 집 층을 가리킨다.
서율이 아빠 집에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엄마는?"
"엄마 누나 데리러 가야지"
"응!"
둘째가 밝게 뛰어간다.
현관문을 여는 것을 보고 다시 1층을 누른다.
둘이 계속 싸우는 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찌 걱정이 안 된단 말인가.
9시가 다 돼가는 시간 밖에 혼자 있는 딸아이가.
핸드폰 위치추적을 켜며 얼른 달려가본다.
없다.
전화해 본다.
"서안이 어디야?"
"나 집 가고 있어"
"엄마 지금 다시 왔는데"
"서율이는?"
"집에 데려다주고 왔지, 너랑 둘만 배드민턴 치려고, 그럼 거기 있어 엄마가 너 있는 곳으로 갈께"
길이 엇갈렸나 보다.
"아니야, 엄마 내가 거 기갈께. 엄마 거기 있어!"
서안이가 금세 달려왔다.
"엄마 정말 나랑 배드민턴 또 치려고? 너무 늦지 않아?"
"응, 딱 세 판만 치자 늦었으니"
서안이가 팔딱팔딱 뛴다.
핑퐁핑퐁 서안이가 제법 잘 받아낸다.
몇 번은 공을 떨어트리기도 몇 번은 잘 받아내기도 하며 서로 한판만 더 한판만 더 하다 스무 판은 친 듯하다.
"이제는 갈까? 내일 학교 가야지"
"좋아!"
서안이와 나란히 걸으며 말한다
"서안아, 너 외삼촌 있지. 엄마 남동생이잖아. 엄마도 너처럼 남동생이 있잖아."
"응, 엄마도 외삼촌이랑 많이 싸웠어?"
"당연하지. 하루에 열두 번 싸우고 열두 번 화해하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 엄마랑 외삼촌 엄청 사이좋지?
어릴 적에는 엄마한테 한주먹거리도 안되던 외삼촌이 지금은 키도 엄마보다 훨씬 커서는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하지만 서안아 그게 공짜로 된 게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공식적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은 동생뿐이라는 재밌는 꽁트들도 얼마나 많아, 그런데 무작정 화만내면 내 말을 듣겠니? 오랜 시간 아주 오랜 시간 당근 주고 사랑 주고 타일러주는 거야. 그럼 온전한 내편 내 동생이 되는 거지"
서안이가 재밌다는 듯 계속 듣는다
"배드민턴을 치다가 공이 툭하고 떨어지면 내 곁이든 멀리이든 그 공으로 먼저 달려가는 거야. 달려가기 귀찮으면 달려갈 흉내라도 내보는 거야. 네가 열 번만 그렇게 하면 동생도 같이 달려와. 그리고는 같이 줍다가 머리를 한번 부딪히는 거지. 그렇게 웃는 거야. 서로 양보하다가 부딪히면서."
"머리를? 이렇게 이렇게?"
머리 부딪히는 흉내를 계속 내며 웃는다.
"그래 바로 그렇게! 그리고 동생이 실수하면 같이 일부러 실수하는 게 아니라 '실수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다섯 글자만 내뱉는 거야. 그리고 웃어주는 거지. 깔깔깔. 그럼 동생도 네가 실수하면 같이 웃어줄 거야. 그렇게 계속 성장하는 거야. 그리곤 영원힌 너의 부하로 만드는 거지. 어때?"
"좋아!!!"
"자 그럼 서안이 이제 집에 가면 제일 먼저 뭐 해야 돼?"
"목욕해야 돼"
"목욕하기 전에 딱 하나만 더 했으면 좋겠는데"
"서율이에게 먼저 사과할 거야"
"그래! 맞아, 그렇게 동생이 너의 부하의 길로 들어오는 거야. 알았지?"
"응!"
그날밤도 서안이는 웃으면서 잠들었다.
가정 내 무공부 삼일째.
퇴근길에 서안이에게 서 전화가 왔다.
"엄마! 우리 도서관에서 책 읽고 있을 테니까 엄마 간식이랑 물 싸 오면 안 돼?"
"왜 안 되겠니, 그런데 배 안 고파?"
"우리 아까 피아노학원 가기 전에 집에서 많이 챙겨 먹고 왔어!"
"그렇구나. 그럴게!"
퇴근하고 아이들이 부른 곳으로 가보았다.
아이들은 뭘 그리 진중한 지 작은 몸으로 앉기도 서기도 하면서 본인 나름의 진중한 일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 읽거나, 꽂혀있는 책 제목을 훑어보고 있거나
그 작은 몸 작은 머리의 진중한 모습이 참 귀엽다.
나를 보고는 아이들이 달려온다.
"엄마 물! 엄마 목말라 엄마 물!"
물을 벌떡벌떡 마신다.
"엄마 이 앞에 문구점 가면 안 돼? 구경만"
"그래보자"
요즘 한창 유행하는 무인 문구점이다.
아이들끼리도 잘 구경 다니고 용돈으로 키링이나 특이한 문구를 사 오기도 하는 곳이다.
다 컸다 싶어도 저녁에는 엄마랑 가는 게 마음이 놓이는지 꼭 같이 가자 한다.
올 적마다 새로운 낯선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가격도 주머니 용돈으로 꼭 살만하게 되어있어 아이들에게는 백화점, 면세점, 마트보다 멋진 곳이다.
한참 구경하다가 살 것 없는지 가자고 하던 찰나
별 접기 종이를 서안이가 집었다.
"이거 하나 살까? 엄마 나 이거 접는 거 가르쳐줄 수 있어?"
"물론이지"
서율이도 사고 싶어 했다.
"엄마가 사줄 테니까. 하나만 사서 같이 접고 다 쓰면 또 사는 거 어때?"
"좋아!"
종이별 접기 하나를 들고 집에 가는 길 불이 환히 들어오는 의자가 보였다.
우리 별 하나씩만 접고 갈래?
"그래도 돼?"
"얼른 접고 집에 가서 씻고 자면 되지"
"응 그렇게 할래!"
종이 끝을 묶고 이렇게 이렇게
종이별을 접는 아이들이 열심히다.
"친구가 매일 수업시간에 책상밑에 손 내리고 이거 접고 있던데"
"수업시간에는 접으면 안 돼~"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조막만 한 입술을 꼭 다물고는
작은 손으로 작은 종이별을 접겠다고
접다가 찢어지고 접다가 틀어지고 완성한 종이별이 쪼글쪼글 해져도
아이들은 다음 종이 다음 종이 접어본다.
초등학교 5학년, 초등학교 3학년
퇴근하고 있는 평일의 짧은 저녁시간
짧은 줄만 알았던 그 저녁시간
그 시간은 짧지 않았다.
문제집 속 가득 적힌 문제 너머,
그 밖의 세상은 가르쳐줘야 될 것 투성이었고
아이들은 나에게 즐거이 배울 것 투성이었다.
그 많은 것을 제치고 나는
문제집 안의 세상만 가르치려 애썼다.
싸우지 않는 법, 별 접는 법, 여유로운 밤산책
내가 아무리 애써 가르쳐도 우리를 이어 줄 것들
울지 않을 것들, 화내지 않을 것들, 마음 속 생채기 내지 않을 것들
그것들이 이리 많았다.
이제야, 종이별 접기를 가르쳤다.
종이별을 다 접고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불안해할 것이다.
일단은 '이래도 될까'싶게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야'싶게 계속 지켜보고 싶다.
화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