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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친절은 여유에서 오고

곳간에선 인심이 나고

by Jessmin

한국에서 여유를 갖고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문화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 또한 일정 부분 '여유'에서 온다.

길거리에서 만난 멋진 옷을 입은 사람에게 잠깐의 칭찬도, 카페에서 눈을 마주친 누군가에게 찰나의 미소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그 옷 너무 멋져요.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라는 말에 싫어하는 낯선 이를 본 적 없다.


우린 매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히, 또 빨리빨리 살아내고 있다.

한때는, 이렇게 사는 게 마땅한 미덕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하늘이 보이고,

꽃내음을 맡고,

친절해졌다.


마침내 내게 여유가 찾아온 듯하다.




미국 유학 중,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환경이 조성됐다.


그곳에서 가끔 내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은 질투였다.


하루에 2~3시간 만을 자며 매일을 살고, 혹여라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까 동동 거리던 때였다.

지치는 날도 있었지만 배웠고, 성장했다.


그런 나의 벅참에 찬물이 끼얹어질 때도 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던 우리나라 모기업의 자녀였다.


“난 적당히 살아. 아주 열심히 사는 건 싫어. 뭐 어차피 졸업하고 경영수업 좀 받다가 너처럼 열심히 일한 애들 뽑아서 일하게 하면 되지. “


그 말을 듣는데 아차 싶었다.

사실이었다.

그는 누구나 알만한 기업의 자녀였고, 난 그런 기업에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었다.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에서 오랜 임원 생활을 한 사람의 자녀 또한 비슷했다.

" 난 열심히 살기 싫어. 아빠가 임원 끝나면 서울에 대리점 3개 받기로 했대.

그중 하나 나 준다니까 그거 굴리면서 살면 못해도 월 몇천은 들어오니까 그냥 이렇게 살면 되지."


그곳은 말만 들어도 끝내주는 입지였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직 머리가 다 자라기 전인 아이들은

남들에게 보여야 하는 '겸손'에 익숙하지 않은 철부지들이 많았다.




그들의 '부'가 부러웠을까?

전혀 아니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진짜 부러운 건 '부'에서 나오는 '여유 vibe (바이브, 분위기)'였다.


그들의 일상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도전도 휴식도 질주하는 페라리의 액셀만 있었다.


그들의 발언이 영화 속 빌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은 꽤 나이스했다.

남들이 잘 되는 것에 질투하지 않았다.

본인보다 높은 성적을 받는 이들 또한 쿨하게 축하해 줬다.


"누가 어디 붙었대."

"걔가 그 수업에서 최초로 A를 받았대."


이런 teeny-tiny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일희일비하는 나와는 달랐다.

그들의 소탐대실하지 않는 '여유'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열심히 사는 데에만 익숙하여 주변을 둘러보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은 내겐 없는 덕목이었다.




한 친구는 부모로부터 서프라이즈 생일선물을 받았다.

한강뷰가 보이는 아파트였다.

한강이 끝자락에서나마 겨우 보이는 아파트가 아닌, 파노라마 뷰의 통창에 한강뷰가 가득 차는 그런 집이었다.


"아파트 진짜 좋다. 이렇게까지 좋은 뷰는 처음이야."


"그러게, 아빠가 서프라이즈로 준비 한 생일 선물이야. 근데 난 강남이 보이는 뷰가 아니라 강북이 보이는 뷰가 더 좋은데,

아빠가 사러 다닐 땐 마땅한 매물이 없었대. 생일 맞춰 사느라 이걸로 샀다더라고. 그래도 만족하긴 해."


"너무 잘 됐다. 축하해."




집에 돌아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돈 많은 친구가 부러워 울었을까?

아니다.

스스로가 너무나 싫었다.

그렇게 친한 친구에게 축하란 마음은 한 치도 없이 그저 부럽고 질투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애써 축하해 준 그 못난 마음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렇게 못난 마음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마침내 여유가 찾아왔다.

간단하다.

인생에 주어진 몇 가지 큰 숙제가 조금 더 일찍 끝났다.


1. 더 이상 스스로의 위치를 누군가와 겨룰 필요 없다.

2. 부모님의 노후가 준비되어 있다.

3. 반려자의 온마음을 다 한 서포트가 있다.

4. 한 사람으로서의 임무가 끝나간다.


홀가분 해진 마음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자녀가 있다면 그 아이를 위해 어지간히 애썼을 것이다.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며 스스로를 녹여냈을 것이다.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가 더 이상 없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마침내 찾아왔다.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

가족과 친구의 행복에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주변의 슬픔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여유가 나를 한결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 여유가 오늘을 온전히 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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