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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울음 자리

by 윤재

25. 온 우주보다 큰



<시와 산책>은 시를 아주 매우 많이 사랑하는 도서관의 사서샘이 선물해 준 귀한 책입니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사서샘의 깊고도 큰 사색의 마음을 담아서인지

두껍게, 무겁게,

그리고 소중하게 다가온 책입니다.




시와 산책 책 표지.png




몇 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고 첫 장을 펼쳤습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옥타비오 파스의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 옥타비오 파스, <시>



<온 우주보다 더 큰>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 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허름한 빛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 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보다가 문득 이런 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p.11


......(중략)...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

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 페르난두 페소아 < 기차에서 내리며>.......p.12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p.14


--- 한정원 저, <시와 산책> 중에서, 시간의 흐름, 2020



이 글은 겨울과 눈에 대한 저자의 깊고 순수한 애정을 사유적인 언어로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눈을 사랑하는 이유를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로 풀어냅니다. 그에게 눈은 깨끗하고 고요하며,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것 자체가 매력적입니다. 눈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동을 주고, 삶에서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가 말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세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중한 만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첫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 매 순간마다 눈이 주는 설렘과 감동을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눈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아침에 눈을 발견하는 순간을 마치 사랑을 발견한 순간처럼 느낍니다. "눈이 거기 있다"는 순간은 그에게 큰 기쁨과 벅참을 안겨주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눈을 마주하는 그 순간, 창밖에서 오는 허름한 빛과 함께 감춰진 감정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며,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와 설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자연을 향한 애정을 섬세하게 풀어내며, 감성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눈을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은 전염되어, 겨울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따뜻한 감정이 피어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눈이라는 자연의 선물이 가져다주는 작은 기쁨과 그것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통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던 아름다움과 감동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저자의 글은 그가 시를 읽고, 쓰고, 다듬으며, 마음속 깊은 사유를 많은 앞 서간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녹여낸 아름다운 문장으로 산책을 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깊습니다.


고요한 산책을 풍성한 마음으로 누리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게 됩니다.


이 책 속에서 잘 정돈된 모든 장면들이 기차꼬리처럼 길게 길게 또 다른 사유로 연결되지만,

아껴 두고 오늘은 첫 장에만 오롯이 머물고 싶습니다.


백 가지쯤 되는 저자의 '눈' 사랑에 대한 부분이 북유럽 화가의 그림을 보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프리츠 타울로브 겨울 풍경.png

프리츠 타울로브, <겨울 풍경, Norsk vinterlandskap>,1890



프리츠 타울로브 (Frits Thaulow, 1847–1906)는 노르웨이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로, 자연의 섬세한 변화를 포착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빛의 효과를 넘어서 자연의 감성을 담아내려 했지요. 특히, 물과 눈, 하늘과 같은 자연 요소를 부드럽고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타울로브는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덴마크 등 다양한 유럽 국가에서 활동하며 풍경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겨울 풍경>은 타울로브 특유의 부드러운 색감과 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눈 덮인 지면과 조용히 흐르는 물살, 그리고 소박한 시골 마을의 집들이 어우러져 겨울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먼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겨울 풍경은 단순한 정경을 넘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지붕과 길은 차가운 계절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집 안에서 풍겨 나올 듯한 온기가 살짝 조심스럽게 열려 있는 문으로 나오는 듯합니다. 타울로브는 겨울의 차가움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 있는 따뜻함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눈이 두껍게 덮인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잔잔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어 인상적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답게 그는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물의 투명함과 반짝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마치 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얼음과 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듯한 모습은 겨울의 고요한 속삭임을 연상시킵니다. 차거움을 알고 있지만, 저 물에 발을 담가보고 싶습니다.



<시와 산책>의 저자도 이 그림을 분명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단순한 겨울 풍경을 넘어 ‘기억 속의 겨울’을 떠올리게 됩니다.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걸으면 뽀드득,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계곡의 부드러운 흐름은 정적 속에서도 생명력을 전달합니다. 봄은 그 물밑 아래로 살며시 조심스럽게 다가오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겠지요.



깊은 겨울, 눈이 내리면, 지금은, 어린 시절의 설렘 대신 조심스러움과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한 때는 하얗게 쌓인 눈밭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남기고, 손으로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눈 오는 날은 더 이상 마냥 반갑지만은 않네요. 이제는 그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위험들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미끄러운 길은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뉴스에서 전해지는 교통 소식은 안타깝고 무겁습니다. 눈이 쌓이고 얼어붙은 도로는 단단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함정과도 같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혹시나 미끄러지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고, 한 번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경험이 있다면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되지요. 젊을 때야 한 번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지만, 나이가 들면 작은 부상도 쉽게 회복되지 않음을 지인들이 전해주는 사례로 넘치고 있습니다. 한 번의 낙상으로 삶의 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이 든 이들은 걸음을 한층 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딛게 되지요.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난간을 꼭 붙잡고, 신발 밑창을 신중히 살펴보며, 눈길을 걷는다는 것이 마치 살얼음 낀 강 위라도 걷는 것 마냥 위태롭습니다.


추위 또한 움츠러들게 합니다.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따뜻한 실내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안한 선택이 되어 버렸지요. 게다가 올해 겨울은 더욱 불안하고 위축되는 계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와 정치의 혼란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고, 격화되는 갈등과 분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와 실망이 차가운 공기와 뒤섞여 더욱 깊은 한기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세상은 한파로 얼어붙고, 우리의 일상은 불안과 분노 속에서 움츠러듭니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지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많아지고,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 둘 신경 쓰이기도 하고.....

비록 이제는 눈밭을 뛰어다니거나 걸어보기보다는 창밖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창문 너머로 함박눈이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소소한 낭만이 아닐까요. 나이가 들면서 겨울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겨울이 주는 아름다움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시와 산책 대문 사진.png




1981년 34세 나이에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여성 최초로 심리학과의 여성 종신 교수가 된 엘렌 제인 랭어(또는 엘렌 제인 랭거, Ellen Jane Lange, 1947 ~ ) 교수는 ‘시계 거꾸로 돌리기(counterclockwise)’ 실험으로 유명합니다. 연구의 목적은 심리적인 시간 변화가 신체 생리적인 변화에 미치는 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다 “는 결론을 이끌어냈지요. 1979년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시간 흐름에 따른 신체의 변화보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노화가 스스로를 더 나이 들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엘렌 랭어교수는 ”우리를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신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신체적인 한계를 믿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라고 제안합니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BBC 방송의 한 프로그램과 우리나라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랭어 교수의 실험을 재현하는 방송을 송출한 적이 있습니다.


뉴욕 브룽크스 출신의 엘런 랭어는 처음에는 뉴욕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나, 시험관을 다루는 인생이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당시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심리학 강의를 들으며 심리학의 매력에 전공을 심리학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랭어교수의 연구 결과를 지지하는 또 다른 사례로 예일대 심리학과 존 바그 교수의 무의식 연구가 있습니다. 존 바그 교수는 단어 제시를 ‘주름살, 회색, 보청기, 지팡이’등의 노화와 관련된 문장 테스트 집단의 실험 참가자인 젊은 대학생들조차 실험 후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을 더 천천히 걸어갔다는 결과를 제시하면서 우리의 뇌는 현실과 언어, 단어, 생각을 구분할 능력이 우리의 예측만큼 크지 않다는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교 연구원들이 500명의 피실험자들의 삶을 추적하는, 1980년부터 2001년까지의 종단연구를 실시했습니다. 피실험자들이 하고 있는 여러 활동 중 75세가 넘었을 때 치매발병률을 조사했더니, 독서를 주요 활동으로 보고한 피실험자들의 경우 평균 치매발병률보다 35퍼센트 낮은 수치를 보였고, 일주일에 4일 이상 십자말풀이를 한다고 보고한 사람들은 47퍼센트 낮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자전거나 수영 같은 신체적 활동을 보고한 사람들은 감소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춤을 춘다고 보고한 사람들의 경우, 76퍼센트나 낮은 수치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과를 내게 적용하자면, 좀 더 긍정적인 말, 희망적인 생각, 좋은 행동을 하면서 독서와 춤을 지속하게 되면 나와 주변이 더 건강해지겠지요.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못 노는 게 아니라, 못 노니까 나이가 드는 것이다. “




오늘은 우주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산책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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