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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Apr 02. 2024

9. 관계: 행복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스트레스원을 고려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영역은 인간관계입니다. 관계는 행복의 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인간관계와 매우 밀접합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를 늘 덧붙입니다. 관계는 고통의 원천이라고 말입니다.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에서(Of Human Bondage)』를 보면 인간의 삶이 관계로 인해 얼마나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Of Human Bondage(1934)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신체적 장애까지 가진 인물이었지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순응적으로 살기보다 아름답고 우월한 것을 갈망하며 자기만의 삶을 개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신학자의 길을 걷다가 그만두고 독일로 건너가 종교와 철학을 자유롭게 공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다 잠깐 동안 영국에서 회계사 일을 배우기도 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프랑스에 머물기도 합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필립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한 사람을 만납니다. 밀드레드입니다. 그녀는 필립이 다니던 식당의 종업원이었지요. 그녀는 필립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필립은 달랐습니다. 그는 밀드레드에게 끌렸고 적극적으로 구애합니다. 필립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밀드레드는 그의 구애를 거절했지요.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면 참 좋았겠지만,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필립은 노라 네스빗이라는 별거중인 유부녀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가까워질 무렵,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밀드레드가 찾아오지요. 그렇습니다. 필립은 밀드레드를 받아들이고, 노라를 놓치고 맙니다. 뭐, 그럴 수 있지요. 그렇게 필립과 밀드레드가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살았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필립의 친구와 바람이 나서 필립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에도 밀드레드는 잊을 만 하면 필립을 찾아와 그의 삶을 크게 흔들어 놓습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관계 문제로 곤경에 처합니다. 필립처럼 친밀한 관계에서의 문제로 고통받을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 때문에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연인이나 부부간의 갈등, 별거, 실연, 이혼 때문에 정신줄을 놓고 헤매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냐, 하고 물으면 그들은 생의 지옥 같던 시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지옥의 한 가운데에는 한때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원수가 되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특별합니다. 살면서 몇 번 경험하지 못하는 짜릿한 감격과 감동,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특별하고, 마찬가지로 살면서 몇 번 경험하지 못하는 치욕과 분노, 경멸을 느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특별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는 셈이네요. 이상해 보이지만 현실입니다. 


이들의 관계가 이토록 극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가까웠던 겁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 간의 정서적 태도나 상호작용 양상을 거리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누구는 누구와 가깝다, 혹은 사이가 멀다, 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적어도 어느 한 시점에는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심지어 거리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는 이런 상태를 ‘융합’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다, 라는 의미이지요. 이와 비슷한 관계를 엄마와 영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아는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로 인식합니다. 그런 인식이 연인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인식은 오류입니다. 사실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황홀감을 느낍니다. 그 황홀감이 두 사람을 더 강하게 연결시켜주지요. 두 사람은 서로 안심하며 각자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하나이니 숨길 필요가 없지요. 비밀을 공유하고 둘도 없는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가 바로 천국의 시기입니다. 


천국의 시기가 언제까지 이어지는지는 관계마다 다양합니다. 변함없는 사실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상대방의 얼굴에 있던 잡티가 눈에 띄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말이나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환상이 스러지고 현실이 깨어납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위기입니다. 이 시기에 현실적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적당히 춤추듯 간격을 조절하면 두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 조절에 실패하여 점점 더 멀어지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다른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지옥의 시작입니다. 


전과 다르게 다툼이 늘어갑니다. 이전에는 거슬리지 않던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필히 멸해야 하는 가문의 원수와 혈투를 하듯 싸웁니다. 문제는 상대가 당신의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상대는 당신의 ‘발작버튼’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쓸 데 없이 유려한 몸짓으로 리드미컬하게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당신이 분노로 이성을 잃을 때까지 발작버튼을 눌러 대는 것입니다. 그쯤 되면 싸움에서 논리는 사라집니다. 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이기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겁니다. 




이번엔 가족입니다. 험난한 연애과정을 잘 견디어 내고, 더 험난한 결혼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훌륭한 커플은 가정을 이룹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자녀를 낳지요. 연애와 결혼과정과는 또 비교가 안 되는 험난한 양육과정을 통해 소중한 한 생명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납니다.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이렇게 가정을 구성하고 꾸려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한 고통 중 가장 심각한 고통은 아마도 가족을 잃는 고통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렸던 컬럼비아 대학의 임상심리학 교수 보나노는 오랫동안 사별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 보나노



그에 따르면, 사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트레스원 중 하나입니다. 사별을 겪은 사람들의 이후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일정 기간 동안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정서적으로 의지하던 소중한 존재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지요. 


그 뿐만 아닙니다. 남겨진 가족은 떠난 사람의 자리를 메워야 합니다. 가족은 일종의 시스템이며 각 구성원은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자리를 떠나면 그가 담당하던 역할이 빌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정서적 역할이든, 경제적 역할이든, 혹은 또 다른 무엇이든, 그 역할을 누군가가 대신하여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고되고 힘든 작업이지요. 구성원 중 하나가 심각한 질병에 걸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담당하던 역할을 다른 구성원이 대신해야 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 또한 누군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가족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 교과서에서 화목하게 웃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돌봐 주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라고 배웠습니다. 맞습니다. 훌륭한 가족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미워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으로 함께 사는 가족이 더 많은 것 같고, 왜 함께 사는가 싶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의 가족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족은 때로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하는 무수히 많은 폭력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정당화되고, 지속되고, 악화되는 폭력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고통의 원천입니다.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사랑의 말로도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것이지요. 상대의 정서적 취약점을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상대를 통제하는 행위도 일종의 폭력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지? 나는 눈 뜨면 네 생각이 제일 먼저 나. 밥 먹을 때도 우리 딸 뭐라도 좀 챙겨 먹었나 하고 걱정해. 난 정말 우리 딸이 행복하면 좋겠어. 요즘 누구 만난다고 했지? 아 걔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요즘 가물가물해. 그래 걔가 직업이 뭐라고 했지? 그래 중소기업에서 인턴한다 했지. 지난 번에 들었는데 또 잊어버렸네. 그래 너가 좋으면 됐지. 돈, 그거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어머어머, 내가 깜빡 잊고 있었네. 너 지희 알지? 왜 뉴욕 사는 엄마 친구 딸. 걔가 좀 있으면 결혼한다잖니. 응, 뉴욕에 있는 골드만삭스 펀드 매니저래. 이름이 피터라더라. 요즘 지희 얼굴이 활짝 폈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몰라. 왜 걔가 예전에는 얼굴도 어둡고 별로였잖니. 근데 사람을 잘 만나니 그렇게 얼굴이 편다, 호호호.”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이 넘치는 말이지만 듣는 딸은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듣는 이가 압박을 느낀다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식의 대화가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진다면, 이 또한 중요한 스트레스원이 될 수 있겠지요. 




친구 이야기도 해 보겠습니다. 친구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입니다. 일단 오래 만난 사람이면서, 정서적으로 친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 봅시다. 청소년기에 같은 반으로 배정되는 동년배 학생들은 여러분의 친구입니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친구끼리 사이 좋게 지내야지,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과민반응하니, 친구끼리는 서로 용서하고 그러는 거야.”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친구’ 관계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말을 들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상대가 정말 나의 친구였는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친구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오래 만나서 얼굴은 아는 사이지만, 상호작용의 대부분은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웠으니까요. 


같은 반이라고 해서,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친구는 아닙니다. 그들 중 일부는 친구일 것이고, 일부는 그냥 아는 학생일 것이고, 일부는 적일 것입니다. 물론 친구가 적이 되기도 하고, 적이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청소년기에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친구 만들기’입니다. 맞습니다. 적은 최소화하고, 그냥 학생을 친구로 만들면서 가능하면 ‘인싸’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여러분의 청소년기 대인관계는 스트레스원이기보다 행복의 원천이 될 겁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학업 스트레스를 능가하는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원이 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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