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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Mar 25. 2024

3. 회피: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

우리의 몸은 안정과 균형을 추구합니다. 균형이 깨졌거나 깨질 것으로 예상될 때 고통이 유발되지요. 고통은 그 자체로 불쾌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줄이는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이 효과적이라면 고통은 감소할 것이고, 몸은 다시 균형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아침 산책을 상상해 봅시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오늘은 왠지 ‘갓생’ 흉내를 내고 싶어져서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길을 나섭니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힘차게 길을 걷다가 내친 김에 근처의 하천가로 향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고 깔끔했는데, 가까이 와 보니 거친 수풀이 좁은 콘크리트 산책로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분위기가 기묘합니다.


  오지 말았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대략 2m앞의 수풀이 흔들리면서 거뭇한 색의 길쭉한 무언가가 쓱 지나갑니다. 순간 당신은 움찔하고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강렬한 공포를 느낍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당신은 수 미터 정도 더 물러서서 동태를 살핍니다. 더 이상 수풀이 움직이지 않고 길쭉한 무언가도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공포감이 잦아듭니다. 참았던 숨을 내쉬면서 당신은 돌아섭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살던 대로 살아야 해. 갓생은 무슨. 다신 오지 말아야지.’




  위 사례에서 우리는 공포라는 고통의 작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자 공포를 느꼈고, 위협이 되는 자극에서 충분히 멀어지는 행동을 하자 공포가 줄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그 다음입니다. 위협적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 장소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회피’라고 부릅니다. 유발된 공포를 줄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포가 다시 유발되는 것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은 고통을 줄이는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발되지 않는 고통까지 예상하여 미리 대책을 마련하는 능력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지요. 이렇듯 뚜렷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회피 능력은 대대손손 이어졌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아주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이거나 회피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하여 아주 손쉽게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회피하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있지요.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담아 『고통 없는 사회(Palliativgesellschaft)』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한병철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고통공포(Algophobie), 즉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재빨리 고통을 몰아냅니다. 이들은 수많은 진통제와 진정제, 마약, 니코틴, 알코올을 복용하고,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회피합니다. 다양한 고통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대인관계 자체를 회피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우리 사회는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 열렬하게 고통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사회의 고통은 이전보다 크게 줄었을까요?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앞서 심리적 고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이미 살펴보았으니까요. 우리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있는데, 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지만, 다행히도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 주제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피의 역설(paradox of avoidance)이라고 불리는 현상입니다. 회피를 하면 고통이 줄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고통이 늘어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현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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