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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Mar 23. 2024

2. 고통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


고통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 의학자가 다양한 답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그들의 답을 열거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답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서 압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영역에서 이렇게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 방법을 공유해 볼까 합니다. 이 방법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특성(특히 쓸모 없어 보이는 특성)의 근본적 기능이 궁금할 때 꽤 유용합니다. 자 상상해 봅시다. 만일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중동 지역의 한 작은 병원 응급실에 5세 남자 아이가 찾아옵니다. 이 아이는 히터에 손을 데어 큰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화상의 고통이 다른 어떤 고통에도 비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섯 살 먹은 아이가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닌 셈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멀뚱히 의료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공포에 경악한 것은 오히려 부모와 의료진이었습니다.

 

  임상면담을 진행한 결과, 아이가 생후 6개월 되던 시기에 화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고, 그때도 전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윗니 4개가 부러지고, 왼쪽 엉덩이가 뒤틀렸을 때도 아이는 아무런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지요. 아이의 체격이나 체중은 보통 아이들과 비슷했고, 의식 상태도 양호해 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온 몸에 아문 상처들이 있다는 점이었지요. 아이의 손과 무릎, 발 등에 흉터가 가득했고, 왼쪽 엄지발가락의 위치가 제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왼쪽 엉덩이가 뒤틀린 탓인지 발과 발목도 부어 있었지요.


  다양한 검사 결과, 아이가 나타내는 증상은 선천성무통각증(congenital insensitivity to pain)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선천성무통각증은 말 그대로 통각이 제 구실을 못하는 병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바늘에 찔려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뜨거운 불에 데어도 아픔을 느끼는 못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 큰 상처를 입고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합니다. 통증을 느꼈더라면 피할 수 있는 큰 손상을 입는 셈이지요. 우리가 고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몸의 통증이 사라지자 우리의 소중한 몸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복잡합니다. 누군가는 둘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따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일단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기로 하지요. 정서적 고통을 몸의 통증과 구분하는 것입니다.


  정서적 고통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괴롭다고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불안이나 공포, 분노, 슬픔, 수치심 같은 것들이 모두 정서적 고통에 해당합니다. 정서적 고통은 몸의 반응을 수반합니다. 슬프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강한 슬픔을 느끼면 일정 수준의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통증과 정서적 고통은 밀접하지요. 하지만 정서적 고통은 몸의 통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관적 불편감을 주기 때문에 따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이제 앞서 했던 상상게임을 다시 해 봅시다. 정서적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965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성 SM은 우르바흐-비테 증후군(Urbach-Wiethe disease)이라는 유전질환을 앓았습니다. 이 질환의 양상은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SM의 경우 뇌의 작은 부위만을 손상시켰습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SM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갔습니다.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SM이 ‘과도하게’ 낙관적이라는 것이었지요.


  SM은 쾌활했습니다. 평소 잘 웃는 편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지요. 문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SM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도 다가갔고, 심지어 심각한 해를 입은 직후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대했습니다. 뱀이나 거미같은 동물들을 보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강한 폭풍이 휘몰아칠 때에도 태연하게 옆집에 놀러가곤 했지요.


  그렇습니다. SM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니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을 미리 피할 수도 없었죠. 우르바흐-비테 증후군 때문에 손상을 입은 SM의 뇌 영역은 편도체(amygdala)였습니다.



  편도체는 아몬드같이 생긴 작은 부위로 좌반구와 우반구 측두엽 안쪽에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다른 뇌의 영역들이 그렇듯 편도체도 다양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 중에 정말 중요한 기능은 두려움이나 공포와 관련된 학습 및 반응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편도체는 일종의 경보기입니다.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즉각 알려서 대응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엄마 몰래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친구들과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소중한 시간에 달다구리가 빠질 수 없죠. 가까운 마트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달콤한 생각에 감격하던 당신의 시야에 스치듯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엄마가 제 값보다 훨씬 저렴하게 샀다고 1시간 동안 자랑했던 기묘한 빨간색 머플러. 그 머플러와 비슷한 무언가가 마트 문 틈으로 펄럭이는 것이 아닌가요.


  이때가 바로 편도체가 작동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당신의 편도체는 재빨리 경보를 울리고 당신의 몸이 도망칠 준비를 하도록 합니다. 심장은 온 몸의 근육에 빠르게 피를 공급하고, 당신의 강인한 허벅지 근육은 금메달을 눈 앞에 둔 단거리 육상선수 만큼 팽창됩니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공포를 느끼며 얼른 그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편도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제 실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SM은 이렇게 소중한 편도체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꼭 필요한 순간에도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힘든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슬픔은 어떨까요? 슬픔은 우리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던 사람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일한 직장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아끼고 아껴 두었던 사탕일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라면, 그것을 잃었을 때 슬픔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슬픔의 고통이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우리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 그것이 곧 슬픔의 고통입니다.

 

  슬픔의 고통에 어떤 기능이 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는 평생을 바쳐 상실과 슬픔을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조지 보나노(George Bonanno)입니다. 그에 따르면,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은 일종의 타임아웃(time out)을 갖습니다. 맞습니다. 운동경기를 잠깐 중단하고 짧게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전략을 짜는 시간을 타임아웃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타임아웃입니다.


  슬픔의 일차적 기능은 타임아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일부를 잃었으니 예전에 살던 대로 살면 안되는 것이지요. 작전을 다시 짜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면서 싸맬 곳은 싸매고, 이어 붙일 곳은 이어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슬픔은 각성 수준을 낮추고 다른 활동에 대한 흥미를 줄여 줍니다. 딱 혼자 있고 싶은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혼자가 되어 많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답답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큰 문제없이 경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습니다. 슬픔은 내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변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표정 때문일 수도 있고, 눈물 때문일 수도 있고, 평소와 다른 태도나 행동 때문일 수도 있지요. 우리는 슬픔의 징후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가만히 다가가서 묻습니다. “무슨 일 있어?” 상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당신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겠지요. 그 마음은 상대를 돕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슬픔의 또 다른 기능입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큰 상실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꾸역꾸역 살게 될 겁니다. 왜 전과 같이 살수 없는 것인지 의아해 하면서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우리가 너덜너덜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도움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무너져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이제 정리를 해 봅시다. 우리는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고통이 없다면?’ 질문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몸의 통증이든, 정서적 고통이든 우리가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고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펴보지 않은 고통의 유형들이 많지만, 세부적 기능이 다를 뿐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모든 상황에서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고통 자체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주지 않습니다. 고통은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이며, 적응에 도움이 되는 반응이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사전과정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이 유발되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삶이 가장 이상적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수시로 위험한 상태에 놓일 수 있고, 그럴 때 우리에게 경고신호를 보내어 우리가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해줄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죠. 고통은 바로 그 시스템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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