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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Mar 22. 2024

1. 우리는 모두 괴롭습니다

A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집들과 좁은 골목이 보입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기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 걸어 보기로 합니다. 걸어갈수록 골목은 점점 더 좁아지고 어두워집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면서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때 A의 뒤에서 무언가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듣기는 힘듭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위협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A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두려움이 더 강렬해집니다. A는 달리려고 발을 움직여 봅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 발이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니 무력감과 공포가 마음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 무언가는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도망치려고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너무 두려워 정신을 잃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그 무언가가 바로 뒤에까지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A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듭니다.


“A야! 이제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 엄마였습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꿈은 깼지만 A를 쫓던 무서운 대상이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옷은 땀에 젖었고, 몸은 물먹은 솜 같습니다. 너무 무겁습니다. 하지만 일어나야 합니다. 몸이 뻐근하고 아픕니다.


  눈을 부비면서 화장실로 향합니다. 잠겨 있습니다. 15년차 원수인 남동생의 방구 소리가 들립니다.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자동으로 그려집니다. 냄새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괴롭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거실에 앉아 계시던 아바마마께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째 요즘 살이 더 찐 것 같다?” 아바마마, 그 말씀은 일종의 언어폭력이옵니다, 라는 말이 성대까지 올라왔지만 참습니다. 아침부터 적을 많이 만들면 하루가 너무 괴롭습니다. 대꾸하지 않고 돌아섭니다. 살이 몇 킬로는 더 찐 느낌입니다. 아침은 굶어야 겠습니다.


  학교에 오는 길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가령 학교에 제출할 과제를 두고 와서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다녀온 일) 생략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학교에 왔습니다. 지각입니다.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아침부터 몸을 혹사했더니 너무 피곤합니다. 천근만근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정도로 무겁다고 생각해 봅니다.


  수업이 시작됩니다. 수학입니다. 하나님은 A를 싫어하시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보아가며 견딜만큼만 고통을 겪게 하신다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범생은 아니지만 불량학생이 되는 것은 싫어 열심히 집중해 봅니다. 소용없습니다. 눈이 감깁니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네 선생님,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라는 의미로 받아주시길 희망해보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A야, 조금 졸린가 본데 2번 문제 한 번 풀어볼까?” 상냥하신 수학 선생님이 선의로 A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칠판 앞으로 나갑니다. 무엇이 적혀 있기는 한데 외계어 같습니다. 최대한 죄송한 표정으로 머뭇거려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반 친구들의 눈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A를 비웃고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왜 우리 학교는 쥐구멍을 남겨 놓지 않았는가, 하는 원망이 들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학교의 방역시스템은 훌륭합니다. 상냥하신 수학 선생님 역시 훌륭합니다. 나의 부족한 수학실력 개선을 위해 문제풀이 50개를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밤에도 일찍 자기는 어렵겠습니다.




  A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여러분의 삶과 동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아니면 여러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분께서는 상당히 익숙하고 일상적인 예화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A의 일상은 저의 일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낮 동안의 괴로운 일들이 꿈에서 계속되고, 그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잠을 푹 못 자면 몸이 회복되지 않아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요.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면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몸에 질병이라도 생기면 그 고통은 몇 배가 되지요. 출근 과정에서의 괴로움을 견디고 일터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새로운 고통이 시작됩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지루한 반복 업무를 처리해야 하며, 아픈 허리를 주물러 가면서 책상 앞에 앉아 수업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갑자기 생겨 일정이 틀어지기도 하고, 동료와 갈등이 생겨 불편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크든 작든 우리는 꾸준하게 고통을 경험합니다.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조금 적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어찌 되었든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스콧 펙(Scott Peck)은 그의 일생을 바쳐 다양한 정신과적 환자와 일반인을 상담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하며, 살아가는 과정은 상당히 고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스콧 펙


  스콧 펙의 주장은 과학적 연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수준의 심리적 고통을 겪는지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대략 일반인의 5% ~ 27%가 정신과적 질병으로 진단 가능한 수준의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직장인들은 15% ~ 20%, 미국의 이민자들은 13% ~ 39% 수준으로 좀 더 심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10명 중 서너 명은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 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의 고통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더 늘어나겠지요.


  우리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고통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궁금해집니다. 대체 왜 고통은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걸까요? 우리에게 어떤 원한이 있길래 끈질기게 우리를 쫓아다니는 걸까요? 다음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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