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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Mar 26. 2024

4. 회피의 역설적 효과

B는 대학생입니다. 지방에서 태어나 줄곧 같은 지역에서 지낸 B는 많은 노력 끝에 ‘인서울’에 성공합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도 느꼈지요. 고등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격려를 받으며 뿌듯한 마음을 안고 상경한 B는 평소처럼 열심히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대학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B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입니다. 어려서부터 수줍은 경향이 있어 소수의 사람들과만 어울려 지냈지요.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그렇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학과 동기나 선배들과 어울려야 하고, 동아리나 스터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팀 과제를 해야 하고, 심지어 교수님과 면담도 해야 했지요. 


  B는 낯선 사람과 만나면 일단 긴장합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까, 내 말을 듣고 비웃지는 않을까,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불안감을 느꼈지요. 그래서인지 낯선 사람과 만나면 평소와 달리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말이 어눌해지고, 뜬금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흐름을 놓쳐 뒷북을 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서 B는 또 다시 생각에 잠깁니다.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진땀을 빼며 겨우 자리를 지키다가 모임에서 빠져나오면 새로운 지옥이 시작됩니다.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다르게 말했어야 했는데…’ 


  이런 일이 거듭되자 B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잠깐 동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을 피했습니다. 심지어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도 피했지요. 문제는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수님과의 면담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면담일이 다가오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교수님이 자신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할 것 같은 강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알 길이 없습니다. 심장은 쿵쾅대고 온갖 무서운 생각과 이미지가 스칩니다.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니 조금 낫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아침이 되어 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미 녹초가 된 몸은 움직일 기미가 없습니다. 결국 면담은 취소하기로 합니다. 취소할 생각을 하니 교수님이 더 무서워집니다.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숨어 버리고만 싶습니다. 면담을 하지 않으면 졸업에 큰 지장이 생기지만, 지금 당장은 그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B가 경험하는 공포는 강렬했습니다. 


ⓒ Dharma Comics



  B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B가 한 일이라고는 고통을 유발하는 대인관계를 피한 것 밖에 없는 데 말입니다. 사실 회피의 역설적 효과가 나타나는 정확한 이유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그럴듯한 가설이 있을 뿐이지요. 


  첫 번째 가설은 공상으로 인해 공포가 증폭된다는 가설입니다. 본래 공포는 즉각적인 위협이 있을 때 유발됩니다. 다른 포유류들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공포를 느끼지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은 위협 자극이 실재하지 않을 때에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측 능력 때문이지요. 


  예측이란 간단히 말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상상하면서 위협이 될 만한 일들을 떠올리고, 그 결과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상상과 현실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위협적일 수도 있고, 덜 위협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보고하는 사실은, 공포를 많이 느끼는 사람의 경우 실제보다 더 위협적으로 미래의 사건을 예상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증폭된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더욱 빈번하게 회피를 하고, 그 결과 ‘실제로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를 잃습니다. 그렇게 공포는 점점 더 강해지지요. 


  두 번째 가설은 고통을 견디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입니다. 고통이 불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은 그 경험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적당한 수준에서 고통을 견디며 지냅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딱딱한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있자니 허리와 등의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저는 왜 그런 통증이 느껴지는지 잘 압니다. 그 통증을 지금 당장 제거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견디는 것이겠지요. 할 수 있는 만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적당한 수준에서 고통을 견디며 삽니다. 


  나름대로의 조절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30분 간격으로 잠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해 주고 호흡을 가다듬으면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고통 안에 머무는 시간과 빈도가 늘어날수록 고통을 견디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점입니다. 


  반대의 과정도 가능합니다. 고통을 견디지 않고 피할수록 고통을 견디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감소하면 고통이 유발되었을 때 불쾌감도 강해지고 조절에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세 번째 가설은 고통의 원인이 지속되거나 강화되기 때문이라는 가설입니다. 앞서 고통이 유발되는 원인은 우리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망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거나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즉 고통의 존재 이유는 균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행동 중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회복하는 것과 특별히 관계없는 행동도 있습니다. 


  B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B가 경험하는 중요한 고통은 불안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대한 불안이지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B를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B는 이 균형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대인관계를 회피함으로써 B가 느끼는 고통의 원인이 효과적으로 제거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일 B가 완벽하게 모든 사람들을 회피할 수 있다면 해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투명인간 기술이 상용화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사실 B가 경험하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모든 사람의 뇌를 조작해서 B에 대해 긍정적 생각만 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혹은 상대방에게 뿅망치를 들고 다가가서 “귀하께서는 저에 대해 나쁜 생각을 품고 계십니까?” 라고 정중하게 묻고 ‘그렇지 않다’는 답을 강요할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상대방이 나에게 나쁜 생각을 품는 것이 대체 어떤 실질적인 문제가 되는지를 곰곰이 따져 보면서 현실적인 위협 수준을 파악해 보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효과성과 적절성, 현실성 측면에서 다양한 가치를 갖는 방법들이지만 근본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피는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거리를 둘 뿐입니다. 원인은 그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대로 방치한 원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가설도 완벽한 지지를 얻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가설이 진실을 반영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피가 효과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상황에서 회피는 유용합니다. 위협으로부터 일단 거리를 둘 수 있게 해 주고, 상황을 파악하여 다음 수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기능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회피를 사용합니다. 빈번한 행동은 자동화됩니다. 습관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습관’이라고 말할 때는 ‘비의식적’이라는 의미를 대부분 포함합니다. 나도 모르게,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로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도 말입니다.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낯선 사람만 피하면 됩니다. 친숙하고 호의적인 사람까지 피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회피가 자동화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회피하게 됩니다. 친숙한 사람과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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