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농작물인가
1.
고리타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자녀 양육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있다. 누구누구는 자식농사를 참 잘 지었어, 김씨는 자식농사 망했지 뭐... 놀랍게도 얼마 전 모 연예인의 자녀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 사람 참 자식농사를 잘 지었어.
예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던 표현이었는데, 갑자기 해당 기사에 나온 아이가 배추 이미지와 겹치면서, 아... 이 아이가 배추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이 표현 안에 담긴 숨은 가정들이 내 마음을 떠 다니면서, '이건 아닌거 아니야?'라고 충동질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2.
'자식농사'라는 개념에는 자식=농작물, 부모=농부라는 공식이 담겨있다. 이 공식안에 담긴 몇 가지 숨은 가정들을 살펴보자.
첫째, 농작물은 수동적이다. 배추는 주도성도 자율성도 없다. 배추는 자신의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뿌리를 뽑아 다른 곳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 옆에 있는 다른 배추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온갖 조종 기법을 동원해 옆의 배추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없다. 그냥 농부가 잡아준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둘째, 농작물은 자신에게 좋은 환경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스스로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농부가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준비해 줘야 한다. 유치원도 잘 골라줘야 하고, 담임선생님도 여러 방법을 동원해 구워삶아야 하고, 어떤 고등학교에 진학할지, 어떤 대학교를 목표로 공부할지 등을 모두 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셋째, 농작물을 잘 관리해 주면 좋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으면 죽거나 망가질 수 있다. 그 모든 책임은 농부에게 있다. 아이가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그것은 모두 부모의 탓이고,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그것 또한 부모가 잘한 탓인 셈이다.
넷째, 농작물은 적당한 가격에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농작물은 기본적으로 농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때 농부는 투자한 자원과 가격을 저울질해서 가능하면 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싶어한다. 이윤을 적게 남길 수 밖에 없거나, 혹은 적자가 나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수년 간 비싼 음악 과외를 했으면, 콩쿨에 나가서 순위권에는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뭔가 명예라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좋은 데 시집이라도 보내서 뭔가 경제적 이득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
3.
물론 자식농사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어떤 가혹한 환경이 주어져도 정성 들여 가꾸고 보살펴줘야 한다, 는 식의 의미말이다. 바라건대 그런 의미만 남아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분별있게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하기 어렵다면, 그러기 귀찮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자식은 배추가 아니다. 스스로 걸어다니고, 싫다고 말도 하고, 째려보며 반항도 하는 배추가 있다면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