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욕망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저 그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일 거다. 초연함이란 것은 잃어볼 것을 다 잃어보고 상처를 받을 대로 다 받아본 사람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하는 감정적 파업 선언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원하기.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슬퍼질 일도 없도록. 그건 ‘욕구 없음’의 고요한 상태이기보다는 욕구를 차단하는 활발한 활동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욕구를 거세해야 하는 운명이라니, 잔인하다.
존재하기와 욕망하기는 분명 다른 말이지만 딱 붙어있는 스티커처럼 떼어놓을라 치면 개운한 맛이 없이 지저분해지는 법이다. [욕망의 대상 - 욕망하기/욕망당하기 —— 안전하게 존재하기] 이 프로세스 안에서 당신은 얼마나 고꾸라지고 성장하며 존재를 보존해 왔나.
필요와 욕구는 여전한데 그것을 충족시켜 줄 대상이 부재할 때 당신은 종종 고장이 난다. 조급해지고 그래서 안 하던 실수를 하고 자신은 더 없어지고 종국엔 자기의 나약함과 오랜 독대의 시간을 가져야 할 테다. 욕망하는 대상의 상실. 그것에는 효익도 있다. 당신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상들에 의존하고 있나? 그런 사실을 헤아리다 보면 교회에 가지 않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할 수 있고 절에 가지 않아도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몇 차례의 상실과 좌절, 관계의 미스-매치를 겪으면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조명할 줄 아는 지혜를 갖게 될 때쯤 당신은 그동안 당신에게 상실과 좌절, 미스-매치의 감정을 안겨주었던 것들을 톺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욕망할 때보다는 확연히 식은 온도로 그것들을 떠올린다. 애초에 왜 그것들을 원했을까, 진짜 원하는 게 그것들이 맞을까, 근데 왜 이렇게 됐을까. 어렸을 적 꿈부터 매년 세우는 실용적인 목표, 동경하는 유명 인물, 애정을 주고받던 연인, 취향이 반영된 옷, 가구 등의 물건들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욕망하던 대상들을 취조하듯 면면히 뜯어보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서 당신은 스스로가 지긋지긋하다가도 의외의 지점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대체 내가 왜 저딴 걸 좋아했지?’
새로운 대상에 열정을 품어보려는 노력과, 다 식히고 초연해지려는 노력 사이에서 맹탕이 돼버린 탓일까. 당신은 새로운 종류의, 미적지근하고 찝찝한 위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바로 환상의 부재다.
The Absence Of Fantasy.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스레 누리던 것들이 부재할 때 그 존재감은 더 강렬해진다. 그것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위들에 제동이 걸리고 다른 것으로는 마땅히 대체할 수 없어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의 당혹감이란. 환상이라는 것이 특히 그렇다. 세상을 향해 막연히 품던 환상이 다 걷히고 나니 당신은 좋아할 거리들이 참으로 없는 현실에 당황스럽다. 순수하게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던 때가 비록 괴롭긴 했지만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란스럽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 애가 타고 속이 상하던 때와는 다른 종류의 위기다. 아우라의 상실, 구미가 당기지 않음, 정열의 소강상태 그 한가운데서 대자로 뻗어버린 당신. 이것이 당신만의 위기는 아니어서, 시대의 온도가 미적지근해진 탓도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서 시대가 뜨거워지는 흐름을 탈 때쯤 당신도 얼마간 다시 열정으로 끓어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남의 판타지를 무너뜨리고 다니는 이들에 대해서는 얼마 남지 않은 열정을 끌어다 써서라도 꾸짖고 싶어진다. 자기 안위만 중요한 비겁하고 이기적인 작자들, 상대가 품은 환상에 숨어 지내다가 까발려지면 꽁무니를 빼는 작자들.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면서. 내가 발견한 재밌는 사실은 그런 작자들은 대개 어떤 연유에서인지 하나같이 빈약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 단발적이고 당장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고 조금이라도 심각한 것들은 구렁이처럼 요리조리 비껴간다. 물론 책임감은 심히 결여된 채다. 위기는 일단 피하고 보니까 발전이 없다. 위기는 기회라는 것을 여태껏 모르나, 머저리 같은 놈들.
근래에 이성에 대한, 얼마 남지도 않았던 내 환상을 앗아간, 밥맛까지 뚝 떨어지게 만든 이는 대단한 파렴치한이었는데, 그가 저지른 온갖 추한 행태들보다 그가 무의식 중에 던진 말 한마디가 나를 더 힘 빠지게 했다.
“연애는 편하려고 하는 건데-”
연애에 꼭 숭고한 의미가 담겨야 하는 것은 아니고, 나 역시 편안한 관계를 꿈꾼다. 그럼에도 이 대사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말이 뱉어짐과 동시에 단박에 발가벗겨진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가 바라던 것은 퇴근 후 술 한 잔 하면서 저녁밥을 먹을 상대였다는 것. 잠자리까지 하면 더 좋고. 무료한 주말 혹은 긴 연휴 동안 함께 여행 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와 꿀리지 않는 적당한 외모를 겸비한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러니까 그 이는 자기의 편한 일상을 헤치지 않으면서 그 틈을 적절히 메꿔줄 수 있는 상대를 바랐고 그런 걸 연애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뒷받침하듯 그 이가 숨겨왔던 추태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연애에 대한 내 환상은 완전히 붕괴되고야 만다. 환상파괴. 그것은 환경파괴 다음으로 전 세계적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조건만 부합하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자리에 내가 마음을 쓰고 있었다니. 연애에 대한 가치관이야 다 다른 것이니까, 뭐, 그렇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정말 왜 그렇게 밖에 못 사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는다. 쪼다 같은 놈.
이런 싱거운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쯤 잘 알고 있다. 와장창- 산산조각 난 환상의 잔해 속에서 길을 잃은 이가 나뿐이 아니라는 것만 봐도 그건 자명하다. ‘솔직히 짝사랑도 축복이다 모두가 십새로 보이는 이 세상에서’라는 트윗에 좋아요를 누르며 공감하는 당신들이 귀여워서 웃음 짓다가도, 각자의 “십새”들 때문에 눈물짓는 걸 보면 속이 상한다. 터무니없지 않을 정도로만 잘 다듬어진 판타지와, 그 판타지를 충족하는 대상을 마주할 기회를 갖는 것, 당신과 내가 바라는 건 딱 그 정도가 아닌가. 그조차도 터무니없는 것인 줄 알지만 그런 일들이 또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냉소에 너무 오래 젖어있지는 않도록 유의하자. 판타지를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이 Chill 할는지는 몰라도, 멋도 재미도 없으니까.
완연한 새해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성실한 매일이 그 해를 빛나게 해 준다는 것을 잊지 말자. 더불어, 더 이상은 십새들이 당신의 환상을 더럽히게 두지 말자. 빼앗기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물론 남의 환상에 초치는 십새가 되지도 말자, 절대로. 2025년엔 모두의 판타지가 판타지로서 오래 자리하길, 그것이 현실화되지 않을지라도 욕망할 거리들로 내내 풍족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