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가만히 있어줘
퇴사하니 어떤가요?
회사를 퇴사하고 나는 기분이 여느 때보다 차분하고 평온했다. 집에서 어떠한 자극 없이 그저 being 하는 형태로 지내다 보니 우울증이나 ADHD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의적으로 의사의 진단 없이 약을 끊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 저녁 울면서 보낸 시간들이 퇴사와 동시에 사라졌다. 더는 울지도 않고 무기력하지도 않았으며 보통의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에게 다시 불안이 찾아왔다. 퇴사를 결심하면서 적어도 1년간은 일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금액을 모았다. 나에게 주어진 1년이란 세월은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항상 doing을 하며 살아온 내게 being을 하라는 것은 어쩌면 고문과도 같았다. 뭔가 하지 않으면 항상 불안했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 때 휴학 한번 하지 않았고 회사를 가서도 쉴세 없이 일했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번아웃이 와서 퇴사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우울증이 사라지면서 조증이 나타나는 시기에는 우울증 때 못했던 일들을 앞뒤 맥락도 없이 실행하게 된다. 우울 시기에는 회사를 못 다니겠다고 징징 거리면서도 상사에게 퇴사 얘기를 꺼낼 기운도 없었고 집에 와선 눕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우울증 때 생각했던 일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점점 기분이 고양되면서 퇴사 후 내 미래는 장밋빛으로 펼쳐질 거라고 확신했다.
어찌저찌 퇴사를 하고 나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대로 사업을 하려면 밑에서부터 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업이나 사업 관련 책들을 잔뜩 사서 읽으면서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라는 생각에 휩싸였고 그러기 위해선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만 상품을 팔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타겟으로 해야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즉시 영어학원을 등록해 매일 다녔다. 그러다가 지금 아니면 삶에서 언제 장기여행을 가겠느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자마자 바로 비행기 티겟 예매했다. 이 일련의 일들이 퇴사 후 2개월 안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머릿속에서 회전하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조증 시기와 맡물리면서 모든지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추진력 있게 나가는 내 모습에 친구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 부럽다고 했었다. 아직은 내가 조울증(양극성 장애)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각들이 빠르게 회전하고 그 생각들 하나하나를 숙고하지 않고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새로운 자극을 쫓고 그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면 바로 다른 자극이 없는지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았다.
조증이 이런 증상이었군요.
여행지에선 뭐든 게 새롭고 재밌고 일상에서의 탈출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정신과 약을 일절 먹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불안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세상을 즐기고 새로운 경험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온갖 자극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고 여행하는 내내 마음속에선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친해지고 평소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 성격이 조금 외향적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아닌 것 같은 나의 모습으로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여전시 신이 나있는 나는 어떤 때보다 목표지향적으로 변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누구나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나도 마찬가지로 영어는 꼭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온종일 영어에만 매진했다. 잠을 자고 싶지도 않고 적게 잠을 자도 피곤하지 않았다. 몇 개월 만에 영어가 빠르게 늘 리가 만무한데 자신감이 상승하면서 이제 곧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할 수 있을 것이란 허황된 생각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생각이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고 영어를 해야 해 아니 사업을 해야 해 아니 취업을 해야 해 하는 등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정신없기도 했다. 누군가 여기 취업 자리가 났다고 해서 면접을 보러 가고, 공무원이 좋다고 하니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1종 운전면허시험을 보기도 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한 달간 어떤 회사 인턴으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갑자기 웹디자인을 배워야겠다고 학원을 등록해 다니기도 했다. 이때 나의 발자취를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여기저기 휘둘리며 중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머릿속에서 회전하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조증 시기와 맡물리면서 모든지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추진력 있게 나가는 내 모습에 친구들은 내가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 부럽다고 했었다. 나 또한 아직 나에게 조울증(양극성 장애)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던 시기였어서 그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방방 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들의 거의 대부분은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탄탄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생각들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고 깊은 성찰 없이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새로운 자극을 쫓고 그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면 바로 다른 자극이 없는지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았다.
그렇게 지내길 6개월 나는 링 위에서 한 대 맞은 권투 선수처럼 뻗어버렸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탈진한 것이다. 나는 앞선 나의 행동들이 평소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우울증이 이따금 내게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덮쳐왔다. 조울증에서의 우울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