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행동에서 파아돈은 정말 보기 드문 고결한 임종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죽음을 앞둔 내용이라고 전제하지 않았다면 그냥 죽음에 대한 깊은 대화, 아니면 자신의 견해에 대해 서로 토론한다고 생각할 내용이다.
정말 담담하게 이야기 해나가는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소신을 잘 받아들이는 주변 인물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소크라테스 본인이 뜻을 굳게 밝히니 주변에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쾌락이란 정말 기묘한 것일세. 그리고 고통이란 으레 그 반대로 생각되지만, 고통과 쾌락의 관계란 실로 애매한 것일세. 이 쾌락과 고통은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법은 없지만, 그 한편을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따르게 마련이네.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몸뚱이는 한 머리에 붙어 있다고 말해야 할 걸세.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고통과 쾌락이 엎치락 뒤치락 했던 것 같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역시 소크라테스도 나에게 확신을 주듯이 말해준다. 내가 겪었던 고통이나 시련을 후벼파서 크게 확대할 필요도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잘 해석해서 또 긍정적으로 볼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찰학자라면 죽기를 원할 줄 아네. 그렇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을 걸세. 왜냐하면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니까.
나는 신들이 우리의 보호자이며, 우리 인간은 모두 신의 소유물 중의 하나라는 것만은 확신하네
신이 날 부르듯이 우리를 부를 때까지 우리의 마음대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찌 부당하다고 하겠나?
나는 보다 훌륭한 분들의곁으로 간다는 기대를 갖고 있을 분 아니라, 나의 선량한 주인이신 신의 곀으로 간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을 슬퍼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서와 같이 착한 사람은 죽은 후 반드시 커다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기대를 갖고 있네.
스스로의 죽음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죽으면 부모님에게 대못 박는 일이다. 죽어서 지옥간다.등 두려움을 조장시키는 이유말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유가 나에게 더 확실히 스스로 목슴을 끊으면 안되는 이유로 다가온다.
무엇이 행동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사유 속에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겠나?
가장 올바로 사유한다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이나 또는 고통이나 쾌락이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을 때가 아니겠나? 즉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될 수 있는대로 그것과 상관하지 않을 때, 영혼이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추구할 때라고 하겠네.
공부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사유를 할 수 있나? 그냥 생각을 한다고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닌데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였다. 모든 세속적인 것에 사로 잡힌 생각을 했던 나를 돌아보는 글귀이다.
가장 날카롭고 가장 정확하게 탐구 대상의 하나하나의 본질을 알아보려고 노력하는자만이 이와 같은 참된 인식에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가장 수수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한 사유만으로 탐구의 대상을 삼고, 이 사유 속에 시각이나 그 밖의 감각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 자체의 밝은 빛만 가지고 참된 존재를 탐구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즉 눈이나 귀나 또는 모든 신체에서 영혼이 분리 되지 않으면, 영혼이 진리와 지혜를 얻은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될 수 있는대로 이런 것과 관계를 끊고, 여기서 벗어나는 자만이 참된 인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심미아스?
관찰을 잘 해야 본질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관찰한 것을 글쓰기에 녹여 실천하게끔 돕는 선생님과 실제 컵을 보며 그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만든 것은 아마 본질을 보고 파악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임을 이 구절을 보고 알게 된다. 참 늦된 사람이라는 것이 또 들통난다. 한 개의 것을 다른 생각없이 깊이 그것만 파악하는 힘도 훈련으로 길러지는 것이겠지. 해보지 않았기에 힘든 것임을 안다.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깊이 있게 파악하려 파고 들면 몰입되는 시간을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직 한참 밑바닥이다.
스스로 정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나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네.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 자연 속에 살았던 소로우 같은 삶. 정화. 요즘 세상에 정화는 어떻게 하는 걸까?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부인도 자식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정신을 배우고 나의 삶에 적용하고 싶다. 현세상의 '정화'를 찾고 있지만 세속적인 내 모습을 보면서 될 수 없다는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것일까?
쾌락에는 쾌락을, 고통에는 고통을, 공포에는 공포를, 마치 금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은 것을 큰 것과 바꾸는 것이 덕을 쌓는 도리는 아닐세. 그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즉 지혜만이 그 진정한 화폐라고 하겠네. 따라서 이것과 바꿔야만 용기나, 절제나, 정의가 올바로 거래될 줄 아네. 참된 덕은 어떠한 공포나 쾌락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좋고 언짢은 것이 따르거나 말거나 오직 지혜에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는 아무런 자유도 존엄도 진실도 깃들어 있지 않은 걸세.
모든 것과 거래할 수 있는 지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나온다. 정화를 할 수 있는 힘도 지혜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남들이 말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유리한 것, 쓸모있는 것을 찾아 이용할 수 있다면 되는 것일까? 쾌락을 더 큰 쾌락이 아닌 고통을 더 큰 고통이 아닌 쾌락을 지혜로 고통을 지혜로 연결하는 것이 어느지점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나를 중심으로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지혜의 가운데에도 '나'가 있어야 함이다.
만일 생성은 직선적인 것이어서 반대의 것에서 반대의 것이 나오는 경우라든가, 본래의 것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한결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더 이상 생성하지 않게 될 게 아닌가?
소크라테스도 양극이 통한다는 일체성, 통일성을 이야기한다.
빛과 어둠은 빛으로 통한다는 말은 빛과 어둠의 반대되는 것 같지만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뜻을 알듯 말듯했다. '생성'이라는 단어가 나의 생각을 확실히 잡아준다. 말장난 같이 보이지만 빛이 '있어야'라는 말이 '생성'이라는 뜻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죽음에서 소생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이 태어남으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다.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니 확실하다.
씨앗에서 자라 꽃이 되고, 꽃이 지기전에 또 씨앗을 만들고, 씨앗이 떨궈지면서 다시 순환이 된다. 이것처럼 삶과 죽음도 그렇게 순환이 된다는 뜻인 것 같다.
시종, 안다는 것은 바로 상기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지금 상기한다는 것은 반드시 전에 배운 일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인간의 형태를 하고 태어나기 이전에 어디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영혼 불멸의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기라는 유명한 단어를 여기서 읽게 되었다. 죽음과 삶에 대해 논리적인 대화에서 그래서 지금 상기설이 맞다는 이야기를 줄줄이 엮어서 이야기하는데 정말 나도 이 단계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조금의 자신감이 사라지는 찰나이다. 아니 나는 처음 이 내용을 보는 것이고 또 계속 접하다보면 익숙해지면서 노련해지고 체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 벌써부터 걱정이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서 상기는 비슷한 것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닮지 않은 것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사람이라서 고차원으로 생각이 가능하기에 은유를 할 수 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시를 쓰는 사람의 은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도 상기일 것이다. 완전 다른 두개의 단어를 엮어서 시를 창조하는 시인들은 정말 탁월한 눈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훈련으로 이루어진다면 더욱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