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 저,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 어떤 사람일까?
20살 때 이 책은 나에게 미궁 속의 이야기책이었고, 몇 달 전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는 연금술사는 나에게 이제껏 없던 울림을 주는 책이다.
한 문장 한 문장 머무면서도 뒤에 문장이 뭐가 나올지 설레어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평생을 옆에 끼고 내 삶의 지침서가 될 책임을 직감했다.
결정이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면 그는 세찬 물줄기 속으로 잠겨 들어서, 결심한 순간에는 꿈도 꿔보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고민의 연속이더라도 결정은 한순간의 그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그 순간은 그 느낌을 따라서 결정을 하는 것 같다. 주변에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은 항상 확실한 것을 잡으라고 말을 했다. 내가 무얼 하든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이 안정적인 것이니까. 그것을 잡으라고 조언을 했고,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근데 요즘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나에게 오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확실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이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은 성장해 나간다.
그러므로 생각도 성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생각들이 하나씩 틀을 깨는 느낌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야.
결정은 했다.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해낸 1명이 있기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하하
위인전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할 수,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눈에 들어온다.
그냥 하는 것.
생각 없이 그냥 하는 것.
이유 없이 그냥 하는 것.
매일 하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 위대한 사람이 되어간다.
철학자의 돌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연금술사들은 금속을 정제하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몇 년을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어. 불꽃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세상의 모든 헛된 잡념들이 조금씩 사라졌지. 그러고는 금속을 정제하면서 결국 그들 자신이 정화되었다는 것을,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것이지.
산티아고는 크리스털 가게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주인은 크리스털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산티아고는 그릇을 닦으며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불꽃을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연금술은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점차 확신을 갖게 되었다.
크리스털 그릇을 닦는 일이 나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지금의 순간을 해내는 것이다. 거창한 일을 한 번에, 아니면 지금의 수준에서 높은 수준의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아마 거창한 일이든 높은 수준의 일이든 모든 것들도 처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꾸준히 해내느냐 못하느냐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을 알았지만 몰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와닿지가 않았다. 내가 못한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됐다. 어느 정도면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했지만 안 되는 나를 보면서 한심함을 느꼈다. 그 어느 정도를 왜 내가 정하냐고, 그 잣대를 가보지 못한 내가 정하냐고. 지금 돌이켜보면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배우는 거야. 저 삶의 방식과 내 방식이 같을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는 제각기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길이고, 그게 바로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지.
한 가지 방식이 아닌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뭐든 자기의 사명을 가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깨우쳐 가는 것이다.
자아 신화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각자의 방식대로 하면 된다. 각자의 신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매일 꾸준히 하는 것.
꾸준히 하는 것만이 자아신화를 이루는 방법이다.
마크툽. 내가 만일 당신 신화의 일부라면, 언젠가 당신은 내게 돌아올 거예요
신랑의 신화의 일부가 나?? 나의 신화의 일부가 신랑?? 하하하~
내 신화의 일부인 신랑에게 좀 더 정성을 쏟으라고 이 문장이 나에게 왔을까?
이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야. 불순물이 섞인 유황을 분리해 내야 하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말로 이제껏 ‘위대한 업’을 시도해 보려던 내 의지를 꺾었던 주범이지.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 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실패의 두려움은 유독 한국 사회의 전유물 같다. 이 또한 남의눈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사실 완벽주의자도 아니면서)라는 말에 어쩌면 자신을 끼워 맞춰서 실패의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남의 실패에 대해 그렇게 많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았다. 나 혼자 의식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을.
나도 나의 신화를 위해서 지금이라도 시작을 하게 되어서 기쁘다.
소유의 개념과는 별개인 사랑이란 정말 무얼까
양치기의 아내 VS오아시스의 아내
양치기의 아내는 사랑하니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아내는 남자를 사막으로 보낸다. 결혼이 각자의 신화를 이루는 일부라면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는 결론이다. 서로의 신화를 위해서 한쪽이 힘들다고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로 힘을 실어주고 북돋아줘야 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이제까지의 긴 여행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자아의 신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의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아닐세. 그대는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있어. 나는 다만 그대의 보물이 있는 방향으로 그대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줄 따름이지.”
자아의 신화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이든 아니든 나의 신화를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나의 신화를 이루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포진해 있다는 뜻?? 내가 우주의 중심인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일이 잘 풀린다고 자만하지 말고, 시련이 왔다고 포기하지 말고 자아신화를 이루려는 자는 신의 보호 아래에 있으니 묵묵히 나아가면 된다.
배움에는 행동을 통해 배우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네. 그대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여행을 통해 다 배우지 않았나. 이제 남은 건 한 가지뿐이지.
어쩌면 나도 내가 살아온 경험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는지도 모른다. 다만 실천이 빠졌을 뿐.
그대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그대의 마음이 모든 것을 알 테니. 그대의 마음은 만물의 정기에서 태어났고, 언젠가는 만물의 정기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니.
자아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잘 알아야 한다.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 지금 생각해 보니 속속들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 그냥 나를 알아가고자 하는 자세로 나를 보면 되는 것인가??? 나를 신뢰하고 나의 내면의 소리에 따라가려는 확신???
뭔가 아리송하지만 헉~ 자아신화를 향한 첫발을 뗀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이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제는 애써가면서 알고 싶지 않다.
그냥 다음에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손에 잡게 되면 다른 깨달음이 나에게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위해 또 다른 독서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