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 단짠한 삶

멸치볶음

by 지음

남쪽으로 여행 다녀온 기념이라며 아는 언니가 멸치를 내밀었다. 최상급 죽방멸치이다.


어제저녁, 멸치볶음을 하려다 다른 반찬에 밀려 하지 못했다. 조리대 위에 멸치가 나를 째려보며 최상의 나를 왜 조리대 위에 얹어 놓고 거들떠도 보지 않냐는 시위를 하는 것 같다. 지퍼락을 열어서 멸치 맛을 본다. ‘우와~ 맛있다. 역시 죽방멸치!!’라며 나를 째려본 멸치가 째려볼만하다며 칭찬한다. 이왕 멸치로 태어나 죽음을 맞이한다면 최상의 죽방멸치로 태어나는 것이 멸치로써의 마지막 삶이 죽음이 되는 순간 최고의 죽음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 걸까 죽음의 생각 끝에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빛깔도 곱고 짜지 않은 멸치를 집어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집어먹는 멸치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멸치볶음을 해서 갓 지은 밥에 얹어 먹고 싶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나는 멸치 볶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봉지에 든 멸치를 체에 다 털었다. 밥이랑 먹으려면 짠맛이 덜한 것 같아서 간장도 조금 더 첨가하고, 마늘이랑 견과류도, 그리고 깨랑 달달한 것들도 같이 넣어서 휘리릭 만들었다.


단짠단짠 멸치볶음이 완성되었다. 아이들을 깨우며 아침 반찬으로 멸치볶음이라고 일어나서 맛보라며 깨웠다. 역시 막내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맛을 보고는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등교한다. 아침부터 죽방 멸치의 죽음은 우리 집 편식쟁이에게 맛있게 밥을 먹도록 톡톡한 역할을 했다. 내가 먹어봐도 맛있다. 단맛과 짠맛의 조화 속에 견과류와 깨의 고소한 맛까지.


사람들은 인생도 음식의 맛에 비유한다.

짠맛만 있는 인생, 단맛만 있는 인생이 있을까?

죽음과 삶을 떼어 놓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는 와중에도 맛있는 멸치 반찬을 만들어 밥을 먹는다.


전에는 삶의 끝에 죽음을 놓고 봤다면 지금은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전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봤다면 지금은 삶과 죽음이 한 몸이란 생각이다.

전에는 죽음의 무게에 짓눌렸다면 지금은 삶을 잘 살아보려는 생각이다.


모든 삶은 자신의 기준에서 말한다.

자신의 인생도 남의 인생도 그렇게 죽음 앞에서 결론지어 재단하려 한다.

굴곡진 인생이라고, 아님 평탄한 인생이라고.


굴곡진 인생에도 굴곡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쁨과 환희가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 평탄한 인생이라도 슬픔이나 시련이 한자리 차지할 때가 있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을 하며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중 자신의 삶이 평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새벽독서의 리더 말이 떠올랐다.

보이는 것 이면의 것을 봐야 한다고. 멸치를 볶는 와중에도 계속 생각이 맴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어야 다시 새로운 원인이 있다. 원인과 결과.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러나 삶에 대입해서 해석을 잘 해내지 못할 뿐이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이다.(주1) 외부 환경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선택은 할 수 있다. 지금의 삶은 나의 연속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그렇게에 억울할 것도 남탓할 것도 없다.


좋지 않은 외부 환경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나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에 따라 살아온 것에 따른 결과가 나온다.


단짠단짠이란 말이 생긴 이유를 알겠다. 인생도 단맛과 짠맛이 등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시련이 온다고 시련만 오는 것도, 기쁨이 왔다고 계속 기쁨만 있는 삶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오면 오는 대로 왔구나. 생각하고 잠깐만 감정에 취하고 빨리 빠져나오면 된다.


감정에 빠져 있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 해나가면 된다.


말이 쉬울 수도 있다.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 되는 삶을 살아온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삶의 원리를 하나씩 깨우치면서 감정적인 행동에서 해방이 되는 느낌이다.


이제는 단짠단짠 멸치볶음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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