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도착한 미국에서 받은 선물
영어는 지금도 제일 중요한 언어다. 시험이나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2021년 ‘W3Techs’라는 web사이트가 Alexa.com 트래픽순위로 분석한 결과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언어는 1위 영어 60.4%, 2위 러시아 8.5%, 3위 스페인 4.0%이다. 이제는 영어를 모르면 취업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10여 년을 돌아간 그때, 세계화니 국제화니 영어회화를 못하면 낙오된 인생을 산다는 강박관념으로 각종 영어학원과 토익, 토플 학원들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하기사 어뤤지, 오렌지 하며 영어발음을 가지고 대통령회의에서 까지 나오던 시절이니 그 파급은 엄청났다. 그 틈에 우리도 있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미국 어학을 배우러 유학이라니 그것도 미성년 자녀 둘을 데리고 간다면 과연 이런 사례가 있긴 할까, 아이들이 고1, 중1, 신학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유학 이야기가 불쑥 나왔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아들 하는 것 보니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단순한 한 사건으로 시발되었는데 이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자 주변에서 입방아들이 난리가 났다.
주변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정말 대단하다(격려) 어떻게 아이들을 데리고 아는 사람 아무 없는 곳에 가서 정착하며 공부를 한다니 멋지다, 부럽다, 나도 그런 생각을 용기를 가져 봤으면 잘해봐. (파이팅)
2. 잘 다녀와라, 잘 되겠지 뭐, 나중에 보자 (덤덤)
3. 가면 짐 풀기 전에 울면서 돌아올 테니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아빠를 기러기로 만들고 그것도 큰집 며느리가 진심으로 충고한다. (멈춰라)
유학을 원래부터 꿈꾼 것은 아니고 평소 글로벌 세계화에 관심을 조금 가졌었는데 우리 아이들의 직접적인 현실에 부딪히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엄청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아내랑 아이들이 모두 떠나는 길에 기러기의 고충을 말하는 주변을 설득할 묘안들이 별로 없었다. 다만 용기만 필요했던 것 같았다. 무지함 속에서 용감하게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인데 시작부터 난항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유학 보내자고 찾아간 서울의 유명 유학원마다 40대 중반의 아주머니의 그것도 미성년 자녀가 둘씩이나 따라가는 것은 미국 F1 visa(유학비자)는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유학 대행업체들의 단호한 말에 고정관념 없는 무지의 내가 직접 해보기로 했다.
우선 닥친 문제는 세 가지이다.
I-20을 받는 것
F visia를 받아야 하고
현지에 초기에 안전하게 정착하는 것이다.
I-20 받기>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40 중반인 아내가 어학을 배우는 학생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달라스라는 정착 지역이 결정되니 접수 기간만 맞으면 I-20는 인터넷 신청으로 의외로 쉽게 받을 수 있었다. I-20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과 학교만 선정되면 받는 것은 수월했다.
F VISA 받기>
이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마침 우리는 어학원을 직접 운영 중이라 왜 영어를 배우러 가야 하는지 설명이 가능하기에 직접 도전한 것이고 무모한 자신감도 있었다. 왜 어학연수를 가야 하는지 다녀오면 어학원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상세하게 적고 아내가 상장받은 것부터 자료란 자료는 모두 모아 큰 파일링하여 준비하였다. 신청서는 앞선 블로거들이 잘 올려준 내용을 보고 따라 하며 대사관 사이트에 아주 신중하게 작성을 하여 제출하고 나니 자신감이 엄청 솟아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매며 의지하는 유학원의 역할을 잘 모르겠다는 큰 소리까지 했다. 심사당일 초조하게 가족을 미국 대사관에 들여보내고 하염없이 출구 쪽만 응시하는데 저 멀리에 아내가 나오면서 V자를 그린다, 행운이다. 우리가 직접 해낸 것이다.
현지 안전하게 정착하기>
이제 남은 것이 현지정착이다. 사실 유학을 결정하고 학교 검토 단계부터 달라스 현지 한인회 사이트를 맴돌며 서치를 하다 우연히 알게 된 어느 교회(달라스, 큰나무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에서는 당시 유학 오는 사람들을 위한 정착 도우미가 가능하다고 되어있었다. 아마 인근 UNT라는 대학이 있어 학생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듯했다. 교회는 어릴 때 다녀보고는 안 다녀봤지만 연락을 취했더니 현지 젊은 남자 집사님께서 담당이라 하며 친절히 안내를 해주신다. 집을 구할 정보와 학교에 접수된 결과서 확인등 유학 전 준비해야 할 서류 및 학교 컨택까지 도움을 주시는 것이다. 귀찮을 만한데도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계신 듯 미안할 정도로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미국 도착 후 에는 공항 픽업에서부터 초기 생필품과 심지어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도 도와주시고 심지어 잠시 차를 정차시켰다고 누군가 차를 끌고 가 버려 아이들과 울고불고 또 교회 사람들의 도움으로 되찾아왔다. 아이들 학교 안내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영어소통이 원활치 않자 현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던 연세 지긋하신 장로님께서 직접 같이 동행을 해 주시고 이렇듯 정착 초기의 어려운 일은 교회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셨다. 대책 없던 이들은 신의 가호를 받았다.
무모하게 갑자기 도전했던 미국 가족유학은 각자의 위치에서 본인의 충실한 역할로 시행착오와 고난의 시기를 겪어내며 서로를 도와주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안정(시민권자, 영주권자로서 직장인)에 이르렀다.
아내는, 미국학생으로 수업을 들으며 아이들의 공부를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사춘기 아이들은, 낯선 환경에서 적응의 어려움과 삶의 부족을 인정하고 참아내며 자신과의 싸움을 극복했다.
국내에서는, 늘 부족하게 보내주는 역량을 안타까워하며 홀로 버텨왔던 내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