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다. 사는 게 시시하다. 어릴적 누군가 사는 게 이 정고로까지 시시한 줄 진지하게 알려 줬더라면, 진즉에 내 생사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자아가 생성되기 전에 던져진 생명이라고 사는 그 자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난 애들 교육에 철학부터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자아가 뭔지, 자기에 대한 자기 선택권이란게 뭔지 정도는 가볍게라도 알려줘 놓고 수학이든 영어든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하지 않을까?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어? 이게 다 뭐고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어셔야 되겠는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허탈하고 허무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렇잖아도 짧은 시간 평생 헛 살았댜고 후회하는 사람이 없게 해야하지 않을까?
대부분은 한 남녀의 섹스의 결과물로서 무작위로 주어지는 것이 생명이다. 사랑을 받건 학대를 받건 우리는 그 시기를 지나 자아가 형성 되기 시작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언제 시작 되었나? 그런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을 주는 영역들이 보통 종교다. 뭐, 여기서 각 종교들의 효옹과 무가치함 들에 대해 논한다면 그건 이미 에세이가 아닐테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다. 이미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발생한 사건의 당자사가 그의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그 가치를 논한다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불공평이며 논리적 모순이다. 성립하지 않은 명제에 대해 그 어떤 신화와 이야기들을 만들어 붙여 주장한다 해도 그 중심부에 뱀의 머리처럼 머리를 쳐들고 도사리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그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나도 답이없다. 답 근처의 언저리에서 문득문득 떨오르는 생각의 파편들을 휘갈겨 놓을뿐이다.
언젠가 누군가 답을 발견한 성인이 계시다면 내 찾아가겠다 그리고 묻겠다. ‘고통없이 죽는 방법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