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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rephath Oct 07. 2024

나와 남편의 대화

나는 아프다. 타고난 자가면역 질환으로 허리도 아프고, 환절기엔 알러지, 감기 몸살은 매일 달고 산다. 오늘도 춥다. 추울땐 남편의 품이 그립다. 십여년 누워있기만 하는 나를 간병하는 남편은 의사다. 자기가 의사라서 그런지 내가 아픈 것에 무력감과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는데. 여자 구실도 못하는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는 저런 착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나는 항상 남편의 눈빛을 살핀다. 그가 나를 응시하는 깊은 연민의 파도가 오늘은 좀 잦아 들었는지, 아니면 더 비바람 치는지. 남편이 왔나보다. 오늘도 누워서 그를 맞는 내 신세가 비참할 뿐…


남편

아내는 아프다. 매일 아프다. 지긋지긋하다. 십여년을 누워있기만 하는 저런 여자와 결혼 해서 내 인생은 아작이 났다.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매일 내 눈빛을 살피는 그녀의 눈이다. 무슨 생각으로 저 여자는 날 꿰뚤어 보기라도 하는 듯,,,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매일 그런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걸까? 내가 바람이라도 피는지 궁금한 걸까? 진짜 바람이라도 피고 싶다. 바람도 못피고 십여년 간병만 하고 있는 내 알량한 도덕심이 날 가장 무력하게 만든다. 오늘도 일 마치고 곧장 집으로 왔다. 그녀는 또 누워서 나를 맞겠지. 누워서 내 눈만 꿈뻑꿈뻑 쳐다 보겠지. 휴~ 지친다. 내 지친 심신은 어디 가서 위로를 받을까?


남편이 왔다. 오늘 그의 눈빛은 깊은 연민으로 가득했다. 안심이다. 그나마 날 불쌍하게라도 봐 주는 그가 있어 내 질긴 생명이 이어져 간다. 나는 진심으로 죽고싶다.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그저 누워서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이 비참함을 누가 알아줄까? 남편은 오늘도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나갔다. 이 방에 와서 내 얼굴을 닦아주고 이마에 키스를 하고 나가면 그는 무엇을 하는 걸까? 한 집에 있으면서 그것조차 알 수 없다. 슬프다. 키스를 하는 그의 입술이 차갑다. 그게 그의 마음의 온도일까?




남편

집에 왔다. 그녀가 누워있는 방으로 갔다. 여전히 누워서 나를 맞는다. 간병인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특별한 상태들에 대해 보고 받고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마에,,, 키스를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다. 간병하는 걸로 모자가 저런 여자에게 입술까지 줘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여자는 불안해 한다. 난 아픈 여자를 두고 바람같은거 피는 몹쓸 놈은 아니라는 걸 매일 그런 식으로 증명해 줘야 한다. 쩝~ 뭐 매일 하는 일이니 오늘도 습관적으로 해 주고 만다. 그녀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왔다. 위스키 반 병을 또 비운다. 이러다가 내가 병 나겠다. 뭐, 술이라도 퍼마시다 죽지…


아침 남편 출근 전, 내게 입맞춤 하는 그에게서 여전히 술냄새가 난다. 어제 저녁엔 또 얼마나 마신 걸까? 나 때문이겠지? 아마 그럴 거야. 나같아도 나같은 여자랑 이렇게 살려면 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남편의 건강이 걱정이다. 저 사람, 한번 마시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 매일 술을 마시는 내 남편을 나는 죽이고 있는 걸까? 나는 물귀신일까? 혼자 죽기 싫어 남편의 바지 가랭이를 잡고 늪으로 빠져 드는 악귀일까? 내가 혐오스럽다. 차라리,,, 남편이 바람이라도 폈으면 좋겠다. 그의 얼굴에서 술취한 붉은 빛깔 말고 생기로 상기된 얼굴을 보고 싶다. 내 간병인은 젊고 예쁜 아인데,,, 차라리 그 아이랑 바람이나 피지. 아니, 이건 진심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난 악귀가 될 지언정 남편의 바지 가랭이를 놓고 싶지 않다. 오늘 하루도 그가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다.


남편

어제 밤도 위스키 반병을 비웠다. 아 속이 쓰리다. 출근 전 그녀에게 가서 간병인 아이에게  밤 새 아내에게 별일 없었는지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숙취에 좋다며 간병인 아이가 꿀차를 타 줬다. 그거 먹고 나니깐 좀 살 것 같았다. 아내에세 키스를 하고,,, 그리고,,, 일하는 내내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이건 뭘까? 그동안 그 오랜 시간 봐 왔던 아이인데, 아무 감정이 없었던 게 오히려 이상한 걸까? 여튼 오늘은 좀 무력감이 덜하다. 일하는데 조금 힘이 난다. 그 아이 생각이 내게 힘을 주는 것 같다. 설렌다. 다시 여자 사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이게 얼마만의 설렘인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나를 놔 줘 버릴까?


오늘도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비참하다. 나는 이렇게 비참한데,,, 왜 오늘 키스를 하는 남편의 입술에서는 꿀 냄새가 났던 걸까? 그 달콤함은 뭘까? 오랫만에 느끼는 남편의 입술이 따듯하게 느껴진다. 그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보인다. 기뻐야 하는데,,, 난 왜 비참한 걸까???


남편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니, 빨리 가고 싶다. 빨리 가서,,, 그녀,,, 그녀를 보고 싶다. 아내가 아닌 그녀가 보고 싶다. 설렌다. 이렇게 오랜만에 다가온 설렘을 난 포기할 수 있을까? 집에 가면,,, 그녀에게서 아내의 상태를 보고 받은 후 난 또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해줘야 한다. 그게 내 현실이다. 내가,,, 뭘 할 수 있나? 이 설렘,,, 놓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아내를 놓지 않아서 가질 수 있는 미래가, 이 설렘이 주는 미래 보다는 더 확실하지 않나? 그래,,, 난 속물이지. 그러니까 이러고 살고있지.


좀 있으면 남편이 온다. 오늘도 난 그의 눈치를 살필 것이다. 오늘 아침에 그의 입술에서 느낀 달콤함이 그의 눈에도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그의 눈에 달콤함이 있다면,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난 물귀신이니깐. 그의 눈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지는 않다. 그의 눈이 방향을 잃은 지는 오래 됐으니까. 그 방황하며 떠도는 눈빛이 나를 얼마나 안심 시켰던가? 그러나, 그 눈이 다시 방향을 찾고 어딘가를 향한다면, 그게 어디인지 난 꼭 알아야겠다.


남편

집에 가자마자 아내와 그녀가 있는 방으로 뛰듯이 들어갔다. 그녀가 아내의 하루에 대해 나에게 보고를 했지만, 별 관심 없다. 어차피 똑같은 얘기들을 들은지 몇년째인가? 그보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중독된 알콜을 끊을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다. 내가 죽도록 취하면 내일 아침, 또 그녀가 주는 꿀차를 마실 수 있겠지. 그 모든게 너무 기다려졌다. 아내가 내 눈을 오늘따라 오랫동안 응시한다. 뭘까? 아내는 뭐가 궁금했던 걸까? 그리고 붉어지는 그 눈시울과 옆으로 흘러 내린 한 줄기의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


남편의 눈은 이 방에 있는 내내 그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심지어 나를 보고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의 눈은 그 아이를 향해 있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남편의 눈의 그 달달함과 설렘과 감정의 폭풍을.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그나마 그것으로 남편이 위로를 받는다면, 날 버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고마워해야 하는가? 오랫만에 아빠가 오신다. 아빠는 내 눈의 눈물을 보실까?


남편

장인 어른이 오셨다. 한달에 한번은 오셔서 내가 바람이라도 피고 있는게 아닌지 감시를 하시는 것 같다. 당신의 딸을 버리지 않고 보살펴 주는 내게 감사하면서도 병원을 물려주려면 그 정도 희생은 당연한 댓가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렇다. 난 병원장의 딸과 결혼했다. 물론,,, 사랑은 했지…


그 아이의 태도가 이상하다. 내 시선을 피한다. 뭐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저 서로 감정의 교감 정도만 있는 걸까? 아니면 같이 잤을까? 같이 잤으면 난 어떡해야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머리채 조차 잡고 흔들 수 없는 나 아닌가? 비참하다. 비참하다.


남편

그녀와 키스를 했다. 그리고, 목에도 키스를 했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가슴이 유난히 예뻤다. 그녀의 가슴을 가졌다. 그리고, 나도 옷을 벗고 그녀의 하체를 가졌다. 깨어보니,,, 꿈이다. 팬티는 젖어있다. 젠장. 난 할 수 있는게 없다, 그저 설레이는 소년처럼 붉어진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힐끗힐끗 훔쳐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녀가 내게 줄 수 있는 미래는 무엇인가? 결혼 생활의 지긋지긋함은 이미 아내가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던가? 내 손에 있는 확실한 미래를 놓치지 말자. 제발 정신 차리고,,, 다시 멍한 눈빛을 되찾고,,, 술이나 퍼마시고,,, 꿀차나 마시자.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붉어진 눈시울을 보신 모양이다. 어쩌지? 아무 말씀은 없으셨다. 그저 잘 견디고 있냐고만 물으셨다. 난 두 남자 의사에게 무력감을 주는 주는 존재이다. 모두들, 나 하나 고치지 못하는 무능한 의사임에 깊은 공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아픈 것은 내 탓인데. 미안하다. 그저 미안하다. 아~ 오늘따라 죽고싶다. 오랫만에, 날카로운, 내 목을 그을 만 한게 없는지 두리번 거리며 찾았다. 혹시 자살이라도 할까봐 흉기가 될만한 것들을 내 주변에서 치워버린지 오래 됐다. 잔인한 사람들.


남편

오늘도 마시고 있다. 아~ 취기가 돈다. 매일 위스키 반병. 소주 같은 건 술 같지도 않아진지 오래다. 동료 의사들이 내 주량을 목격하면 혀를 내두른다. 그러고 어떻게 사냐고들 한다. 바보들아, 그러니까 사는 거다. 취한 김에 사고라도 쳐 버릴까? 그럴 순 없다. 꿀차 한잔과 병원을 바꿀 수는 없지.


남편이 내 방을 찾는 횟수가 줄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 방을 비우는 때가 많아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굳이 알고싶지 않다. 알고싶지 않다. 그 아이가 내 방을 나가면 어디로 가는 걸까? 불안하다. 간병인이 자리를 자주 비운다고 바꿔달라고 할까? 아니다. 그러면 더 불안하다. 그나마 그 아이가 내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다. 난 물귀신이니깐.


남편

젠장,,, 젠장,,, 결국 사고를 쳐 버렸다. 언젠가, 여느 밤처럼 혼자 마시고 있는데, 그녀가 내 방에 들어왔다. 난 올게 왔다고 깨달았다. 그래, 언제까지 사춘기 소년처럼 감정만 품고 있을 수 있었겠나? 그녀는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손끝으로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매일밤 꿈속에서 하던 행위를 하고야 말았다. 그녀를 가졌다. 아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내 눈을 응시하며 내 마음을 살피는 그녀에게 차마 키스를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안다면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불안하다. 장인 어른까지 아시는 건 아니겠지? 가만 있자. 잘만 하면 둘 다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아내는 죽을 것이고, 병원도 물려 받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 이제 대놓고 날 무시한다. 이건 고문이다. 기저귀를 갈아야 해서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아예 일을 하지 않는다. 난 그 아이가 해 주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식사 때도 짐승 사료 먹이듯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남편이 들어오면 활짝 웃으며 그날 하루 나를 극진히 돌봤다는 듯 보고를 한다. 남편 역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남편은 생기 발랄한 눈빛으로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를 한다. 고문이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남편

그녀는 마음까지 아름답다. 나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매우 극진히 돌봐준다. 이대로라면 뭐가 문제인가? 나도 내 인생을 찾고, 결혼 생활도 유지하고, 언젠가 병원도 물려받고. 이제 술도 조금씩 줄여 나가고 있다.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몸을 아껴 두어야 한다. 아~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 아이는 이제 날 짐승 취급한다. 그나마 반려동물도 아닌, 축사에 있는 돼지 취급을 한다. 내게서 나기 시작하는 악취를 남편은 왜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너무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


남편

,,, 모든 것이 끝났다. 아내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버렸다. 유리잔을 깨트리고 그걸로 손목을 그어 버렸다. 간병인인 그녀가 그렇게 극진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그럴 수 있었던 걸까? 그녀가 남긴 것은 그간의 그녀의 악행을 모두 담아 놓은 유서 한장… 그리고,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신하거나 하지 않았으니 병원은 나에게 물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한장. 그러나 아내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내가 자살한 후 나는 병원에서 해고당했다. 장인 어른은 충격으로 쓰러지시고 병원은 의사인 처제가 물려받았다. 그리고,,, 나는 차마 그녀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없었다. 유서의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죽인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난 병원을 떠났고,,, 더 이상 일도 할 수 없어, 술만 마시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 간경화가 왔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후 급성기 병원을 거쳐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요양병원의 침대 한칸,,, 그것이 내게 남겨진 전부이다.


모든 것을 끝낸다. 그 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근처에 있던 유리 잔을 깨트려 숨기고 있다가 그녀가 오면 찔러 버릴 생각이다. 그러나 내게 그럴 힘이 없음을 곧 깨달았다. 섣부르게 공격하다가 상황만 더 악화될지 모른다. 그녀를 죽여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의 고리들의 끝에 이른 결론은 내가 떠나는 것이다. 그래, 나만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해 진다. 병원은 남편에게 물려 주라고 해야겠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유서로 남긴다. 그리고, 지긋지긋하고 질긴 인생을 이제 끝내려 한다. 모두들,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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