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세 늦깎이 임산부의 논어 태교 이야기
우리 아가는 어떤 성격을 가지게 될까?
엄마는 학창 시절엔 몰랐는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작은 거절에도 힘든 나에게 친구들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 좀 버리라고 조언해 주었거든.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뭔지 찾아보기도 했단다.
'언제나 밝고 명랑하다.'
'작은 것도 양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사과한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한다.'
'거절을 잘 못한다.'
딱 나더라.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면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은 죄책감이 들었던 거 같아.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말이야...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거절받는 건 더 힘들었지. 사회생활 초년생일 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사하는 것조차도 망설였어. 혹여나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할까.. 걱정했던 거 같아.
(지금 40대가 되고 나서 그때 일을 떠올리니.. 어떻게 사회생활을 했나 싶어)
나는 왜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거 같아.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거지.
작은 부탁에도 거절이 힘드니까 결국 그 화살이 나에게 돌아오더라. 나의 에너지와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부탁으로 많은 에너지를 쓰다 보니까 하루가 벅찼었나봐. 과부하가 온 거야.
큰 몸살을 앓고 나서야 내가 보이기 시작했어.
그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느라 내 감정과 마음을 돌보지 못했던 거지.
그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왜 그리도 중요했을까?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나를 먼저 챙길 줄 아는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많이 크단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먼저 행복하고 잘살아야 함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내가 바로서야 남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더라고.
논어에 이런 말이 있어. 논어 학이편 1장이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학이편 1장>
人不知而不慍
(인부지이불온)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不亦君子乎
(불역군자호)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학이편 1장>
논어에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어.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날 텐데... 화내지 말라는 말이 확 와닿지는 않을거야.
인정하는 것의 주체가 상대이기 때문이지. 상대의 마음에 달려있는 거란다.
상대의 마음은 상대방의 것이기에 내가 아무리 애를 써서 바꿀 수 없는 내 능력 밖의 일이야.
살다 보면 나와 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게 될 수도 있고. 또 이유 없이 상대가 좋을 수도 있을 수도 있듯이.. 상대도 같은 마음이란다.
그건 상대의 마음이지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내 마음은 아닌거지.
그러면 그냥 무기력하게 가만있어야 할까..
아니. 공자는 다른 사람의 인정 대신 배움을 선택하셨어. 배움은 내 통제 안에 있는 영역이지만 인정은 통제 밖의 영역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한거야.
책 <회복탄력성>에서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고 하더라고. 내가 겪은 역경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니,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거지.
공자는 아마도 회복탄력성이 엄청 높지 않을까..
공자의 말씀처럼 내 능력밖의 일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 나 먼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갈고닦는 편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더라.
그렇게 나 스스로를 갈고닦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나를 좋아해 주더라고.
아가야, 살면서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을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 마음 쓰며 슬퍼하기보다는 내가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의 마음부터 하나씩 갈고닦아 나가보자.
네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면 네 곁에는 좋은 사람이 곁에 머물게 될 거야.
빨리 아가 만나고 싶어.
우리 꼭 건강하게 만나자.
태교로 논어 필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