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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찬 Mar 26. 2024

1부 : 뮌헨협정 - 두 번째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히틀러의 집권, 그리고 뮌헨회담으로.

히틀러의 집권, 그리고 독재체제의 완성까지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다양한 행보를 보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특히나 자신의 주특기인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연설을 통해 군중의 심리를 파악하고 열광시켰습니다.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이후 그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상승했고, 더불어 나치당의 지지율도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지난 연재글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수권법>의 존재로 인해 그야말로 "입법권을 가진 행정부"가 탄생하고야 만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독재로의 길을 굳힌 히틀러와 나치는 이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의회에서 야당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심지어 집권을 위해 잠시나마 손을 잡았던 사회주의 세력도 모두 일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당에겐 아직 한 가지 장애물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치의 정치깡패이자 무력집단 <돌격대(SA)>의 존재였습니다. 퇴역군인인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이 이끄는 이 무력집단은, 나치당의 당군(黨軍)이자 무장력으로서 존재하는 대규모 집단이었습니다.

에른스트 룀. 퇴역군인 출신으로, 어깨(?) 들을 데리고 다니며 나치당의 무력으로서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이들은 정식군인의 위치는 아니었으며, 단지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뭉친 어깨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설명일 것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정치깡패"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다른 정당의 집회에 가서 간판을 부수고 집회를 해산시키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소굴을 습격하여 몽둥이찜질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특히나 초기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바, 사회혁명을 위한 무장력으로서 "인민군(人民軍)"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 특징입니다.




나치 돌격대의 화려했던 영광과 몰락 :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그러나 이러한 사회혁명 성격을 띤 사회주의적 무장세력인 돌격대는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노선과는 최종적으로 맞지 않는 노선이었으며, 이들 간의 반목과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또한 수십만에 달하는 머릿수와 폭력성은, 독재자인 히틀러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옛날과는 달리 합법적으로 집권을 마친 히틀러에게 더 이상 정치깡패의 방식은 오히려 자신의 정적들에게 빌미를 주거나, 혹은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어렵게 되는 일들이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돌격대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히틀러 정권을 뒷받침하는 다른 우익세력과 자본가 세력에게도 큰 부담과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나치당의 초기, 히틀러 스스로도 돌격대(SA) 제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제복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 와중에 돌격대는 점차 그 위용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은 김에, 이제 다시 한번 혁명을 해서 자본가를 때려잡고 모두 국영화를 하자!"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돌격대는 독일의 정규군도 매우 못마땅해했는데, 돌격대에게 있어 정규군은 프로이센 귀족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자본가와 지주 중심의 군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점차 군의 주도권을 두고 독일군과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아니, 그럼 정규군이 더 강력할 텐데, 돌격대를 확 진압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문제는, 이러한 독일 정규군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비무장 상태와 다름없이 껍데기만 남은 집단인데 반해, 나치 돌격대는 무려 300만의 가입자를 배경으로 한 어마어마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룀은 "정규군은 무슨, 사실 우리가 독일의 군대 아님? 그냥 정규군을 우리 돌격대로 편입시키고, "인민군"을 창설하는 되는 거 아님?"이라는 주장까지 하면서 독일군 수뇌부를 경악시켰습니다.

나치 돌격대(SA)는 그 규모를 바탕으로 무섭게 성장했고, 군대의 존재까지 위협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던 1934년 6월 30일, 히틀러는 룀을 포함한 돌격대의 주요 지휘관을 순식간에 체포하고 일망타진하였습니다.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주요 지휘관들은 모두 모여있으라고 한 뒤였지요. 돌격대와는 다른, 향후 인류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집단이 되는 "친위대(SS)" 2개 중대가 현장에 급파되었습니다. 이들은 돌격대의 주요 인사를 모두 체포하고 일소하였으며, 애초부터 체계적으로 뭉쳐있지 못했던 돌격대는 이 과정에서 구심점을 잃고 몰락하게 됩니다. 에른스트 룀은 히틀러와의 대면을 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자결용 권총이었지요. 룀은 자결을 계속해서 거부하다가, 결국 사살되고 맙니다.


  이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 Night of the Long Knives)" 사건으로 인해 나치당 내부의 좌익계열을 포함한,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거나 반대를 표할 수 있는 세력은 모두 일소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방해했던 슈트라서나 폰 파펜, 슐라이허 등도 모두 숙청되거나 권력을 잃고 쫓아내었구요. 이렇게 나치당은 히틀러 개인을 숭배하는 1인의 당으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장검의 밤"을 묘사한 영국의 만평. 나치식 경례를 이젠 두 손으로 하는, 항복을 비유한 표현이 재밌습니다.




전쟁으로 가는 길 :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그리고 라인란트 재무장 사건


  이제 적어도, 정치권에서 히틀러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없었습니다. 또한 앞서 말한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친위대의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그리고 공군 에이스 출신인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며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먼저, 1차 세계대전의 멍에인 '베르사유 조약'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그리고 그 파기를 통해서 독일 국방군(Wehrmacht)이 다시 유럽의 강군으로 재무장할 것임을 온 유럽에 천명하였습니다.

향후 나치독일이 저지른 대부분의 전쟁범죄에 깊숙이 개입한 나치의 준군사조직, 무장친위대(Waffen-SS)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모습.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조직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연합군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라인란트' 지역을 비무장 지대로 규정하였습니다. 즉, 이 지역을 완충지대로 놔둠으로써 혹여나 독일이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자신들의 국경에서 바로 기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둔 일종의 안전장치와도 같았지요. 그러나 1936년 독일군은 기존의 약속을 파기하고 이 지역에 진주, 주둔함으로써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접근하여 주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라인란트에 진주하는 독일군. 이렇게 라인란트의 비무장 지대化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무모한 폭주에 가까운 도발을 연이어 일삼는데 반해, 영국과 프랑스는 비교적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물론 외교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거나 반발하는 등의 표면적 움직임은 있었으나, 실제로 어떠한 물리력을 동원한 방안을 고려하거나 움직이지는 못하였지요. 또한 프랑스의 경우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 끔찍한 숫자의 사상자를 내면서 인구 구조자체가 바뀔 만큼의 타격을 받은 것으로부터 오는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전(反戰) / 염전(厭戰) 사상이 뿌리 깊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안슐루스가 완성(?)된 독일의 지도. 린츠와 빈이 포함된 오스트리아가 독일 제국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에 주목.

  히틀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합병인 "안슐루스(Anschluss)"를 단행합니다. 결국 같은 독일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독일국의 한 부분으로 합병되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내부에서의 작은 반발과 더불어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했지만, 히틀러의 외교적 도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3 제국에 합병되었습니다. 이때 무늬만 투표로 거의 강요하다시피 추진된 주민투표에서 절대다수의 주민들이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이러한 지속된 외교적 승리로 인해 독일 국내에서 히틀러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안슐루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사용된 반 강제적(?) 투표용지의 모습. 독일과의 합병을 묻는 투표지에 "예(Ja)"와 "아니오(Nein)"의 차이가 재밌습니다. 찬성률은 97%.




뮌헨 협정 :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허황된 꿈 속에서


  히틀러는 이윽고, 체코 슬로바키아를 향한 마수를 드러내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에 살고 있는 독일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이제 그 지역은 체코가 아니라 독일국의 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생떼를 쓴 것입니다. 이러한 히틀러의 주장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반발하였고, 독일 또한 물러서지 않으면서 양측의 갈등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데텐란트 지역에 있는 독일인들이 시위 및 각종 소요를 일으키면서, 이러한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습니다.


  물론 체코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당장 주데텐란트 지역을 비롯한 국경 지역에 증원 병력을 급파하였으며,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사동맹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던 프랑스는 체코를 안심시키면서 동시에,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영국은 참전할 것인지"에 대해서 영국 정부에 문의하지만, 영국 정부는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 참전의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피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군비감축과 파운드화의 약세로 제대로 된 군비를 갖추는 데에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바, 적극적인 군사행동에 대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던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영국을 위한 변명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독일에게 유화책을 편 것이 아니라, 사실 영국이 당장 전쟁을 벌이기엔 경제와 국방의 준비가 모두 미흡했거든요. 그렇지만 결국 이런 영국의 애매한 스탠스(?)는 독일의 폭주를 막아내진 못했다는 결과론적인 아쉬움이 있는 사안이긴 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네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체코는 다급해졌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 고민해야 할 동맹국들이, 서로 간의 입장차이만을 확인하면서 미적지근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도 이러한 영국의 행동에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하거나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체코에게 "영국도 참전 안 할 수도 있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라는 입장으로 체코의 속을 뒤집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어떻게 막아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과 같은 참으로 허황된 결론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독일을 어떻게 막아낼지 고민하는 거보다,
독일을 막아낼 상황 자체가 안 오게 하면 되잖아?"



  그렇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독일이 아닌 체코를 거꾸로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간단했습니다. 체코가 주데텐란트 지역만 독일에게 얌전하게 넘겨주면,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영국 - 프랑스 동맹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과 맺은 조약이 휴지조각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속이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졌으나, 실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모두 다른 대안이 없었던 체코는 결국 주데텐란트 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9월 21일 독일에게 해당 지역 모두를 할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후에 할양의 방법과 시기에 대한 논의 도중 히틀러의 생떼(...)로 다시 한번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뻔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중재로 사건을 일단락됩니다.


급격히 쪼그라들어버린 체코의 모습. 각 숫자가 쓰여진 영토가 주변국에게 할양된 영토입니다.

  이렇게, 체코 슬로바키아는 자신의 영토와 주권의 문제를, 자신이 참석할 수 없었던 뮌헨 회담의 결과로 인해 수백만의 인구와 방어용 요새시설, 자동차를 비롯한 중공업 단지를 포함한 알짜베기 땅인 주데텐란트 지역을 잃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 폴란드에게 다른 나머지 지역도 조금씩 할당해주어야 했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은 영국과 프랑스의 "독립보장 약속"이라는 허황된 약속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히틀러와의 약속이 담긴 서명문서를 들고 자신감에 찬 당당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에서 편안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치고 있는 체임벌린. 그를 위한 변명도 물론 이유는 있겠으나, 역사의 평가는 분명하다.

  히틀러의 변덕과 영국-프랑스 동맹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가 만들어낸 독일의 외교적 도박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독일 내에서 히틀러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나름 그의 도박적이고 변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독일 군부마저 그의 성공으로 인해 점차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뮌헨 회담장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좌측부터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입니다.

  이제 독일의 독재자는 자신감에 넘쳐흘렀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지역들이 독일로 복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타겟은, 독일 제국의 정신적 고향이자,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게 할양되어 버린 동프로이센 지역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폴란드의 항구도시, 단치히를 지목합니다. 단치히가 독일에게 할양되지 않는다면,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폴란드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독일이 또 다른 돌발행동을 한다면, 이젠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터였습니다.



폭발직전의 이러한 긴장상태가 계속되던 1939년 9월 1일, 독일 군대가 폴란드 국경을 일제히 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 독일 - 폴란드 사이의 국경 바리케이드를 치우는 독일군의 모습. 이렇게, 지옥 같았던 두 번째의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20년 만에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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