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조직문화, 자율성은 어디까지 존중해야할까? 자율성 동기 이론
저는 운이 좋게도 글로벌 거대 IT 기업들의 본사를 여럿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애틀의 마이크로소프트, 캘리포니아의 애플, 구글, 넷플릭스까지.
그중 넷플릭스 본사에서 한 현직자와 조직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시가 2016년이니, 지금처럼 넷플릭스의 조직문화가 널리 알려지기 전이여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해외 출장을 다녀오며 급히 랩탑이 필요해 직접 구매했고 이후 회사에 비용을 청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여 250만 원짜리 랩탑을 2,500만 원으로 청구하게 되었죠. 그런데 회사는 아무런 확인 없이 그 금액을 그대로 입금해 줬다고 합니다. 그는 곧 실수를 깨닫고 회사에 알린 뒤 다시 처리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바로 지원팀의 확인 요청부터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는 업무에 필요한 비용은 별도로 확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믿는 시스템'이 기본값으로 설계된 조직이었던 거죠.
넷플릭스는 자율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조직 구조 자체를 설계했습니다. 자율성 동기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조직 설계에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몰입하고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율성: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
유능성: 내가 잘하고 있고, 실력이 쌓이고 있다는 감각
관계성: 내가 이 팀과 공동체에 의미 있는 존재라는 확신
사람은 지시받기보다 스스로 선택할 때, 성장함을 느낄 때, 그리고 함께라는 소속감을 가질 때 진짜로 몰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플릭스는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휴가나 경비 정산에도 복잡한 승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직원을 성숙하고, 유능하며, 책임 있는 사람이라고 전제합니다.
성과만 낼 수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직원은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며 실수를 감추기보다 바로잡는 사람이 됩니다. 몰입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만들어 냅니다.
넷플릭스의 자율성 문화에는 냉혹한 전제가 있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눈 현직자는 넷플릭스에서 3년간 일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직원의 60%는 그보다 근속 기간이 짧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곳이 그만큼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이라는 뜻입니다.
넷플릭스는 완전한 성과주의 조직입니다. 성과가 없으면 채용 후 한 달 안에 해고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는 단순히 미국의 고용 유연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넷플릭스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일정을 관리하고 판단하며 결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다만, 그 믿음은 성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곳은 통제가 아닌 자율을 줍니다. 대신 성과가 없다면 자율은 빠르게 회수됩니다. 이것이 넷플릭스식 자율성의 이면입니다. 그들의 자율은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한국 기업의 리더에게는 이런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한국은 해고가 어렵잖아요.
자율을 주면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누군가 분명히 악용할 거예요.
하지만 한국의 자율성 설계가 어려운 진짜 이유는 시스템보다도 두려움일지 모릅니다.
혹시 누가 악용하면 어쩌지?
팀이 흐트러지면 어떻게 하지?
성과가 안 나오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한국은 미국처럼 고용 유연성이 높지 않습니다.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자율'이라는 개념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저런 말들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넷플릭스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형 자율성의 길을 설계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은 해고가 쉽지 않아 조직은 이 구조적 제약을 통제로 덮으려 합니다. 하지만 해고는 못하고 통제만 강화한다면, 직원은 '시키는 일만 하고 조용히 있으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도전은 줄어들고 조직은 점점 무기력해집니다.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구조를 '보호'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마음껏 실험하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며 그 실패를 복구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실험 보장제: 누구나 연 1회,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도나 문제 해결 방식을 제안하고 이끌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이 프로젝트는 결과보다는 실행력과 학습 과정을 중시하며, 실패하더라도 인사 평가에 직접적인 불이익을 주지 않습니다.
의도 중심 회고 제도: 프로젝트 리뷰 시 결과만이 아니라 시도한 이유, 과정에서의 판단, 협업의 맥락 등 '의도와 배움'을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무엇을 시도했고, 무엇을 배웠는가에 집중해 피드백합니다.
사전 복구 설계 제도: 실패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에는 착수 전부터 '실패 시 대응 방안'과 '복구 예산'을 함께 계획하도록 합니다. 실패 이후의 회복까지도 시스템 안에 포함시키는 설계입니다.
직원을 쉽게 자를 수 없다면, 대신 어떻게 더 실패하게 하고 보호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조직은, 통제를 넘어서 성장하는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성과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시도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고용의 제약을, 조직 설계의 창의성으로 바꾸는 방법이 아닐까요?
통제만 남은 조직에서 직원들은 지시엔 따르지만,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살아있는 조직이 아니라 그저 버티는 조직입니다. 우리는 '고인 물'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무너졌습니다.
실패를 설계한 조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시끄럽고 엉뚱한 실험도 많지만 그 안에 진짜 성장이 숨어 있습니다. 실패하게 허용하며,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보호해 줄 때 조직은 생존을 넘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강한 조직은 완벽하게 통제된 조직이 아니라, 실패를 보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조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