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아이~
출근해서 나의 아침은 참 바쁘다.
주야 24시간 가동되고 있는 생산라인에 문제는 없었는지, 근태현황은 이상 없었는지, 설비 트러블은 없었는지 등등
여섯 개의 공정을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로 분주하게 당연히 체크해야 하는 일상 보고를 받는 와중에 비집고 걸려온 전화가 시간을 잡고 늘어진다.
긴급 사항이 아닌 이상 전일 야간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현장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공정별 보고는 일상 중에서도 가정 먼저 파악해야 하는 나의 중요 업무 중 하나이다.
"감사합니다. oooooo ***입니다."
일상적으로 걸려 오는 공정 관리자의 보고 전화인 줄 알고 받았더니
"ooooo 맞지요?"
"네 맞습니다. 전화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저 oo공정 윤**입니다."
"아~네 윤**씨~ 무슨 일 있으신가요?"
"네 차장님이시지요? 내가 회사에 할 말이 많아서 전화했습니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의 목소리는 혀가 꼬부라져 발음도 제대로 안되는듯한 현장 생산직 사원이었고 전화기에서 술냄새가 날 것 같을 만큼 만취한 체 토해 내는 숨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해지는 듯했다.
"oo 씨~혹시 하실 말씀 많으신듯한데 아침에 급한 업무가 있어서 잠시 후 다시 통화를 하면 안 될까요?"
" 아~ 나도 급합니다. 내가 급하다는데 내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시면 우리 이 과장 바꿔드릴 테니 하실 말씀 하세요"
횡설수설하는 말을 다 받아줄 시간이 없고 업무 진행을 이어가기 위해 옆자리 이 과장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긴 얘기를 듣다 못한 이 과장이 다음에 통화를 하자하고 어르고 달래 놓으면 또 전화를 하고 끊고 나면 또 전화를 하고~
인내심 강하고 침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이 과장인데 얼마나 심했으면
"네네 네~ 아이 정말 "
"욕은 하지 말고~" 격앙된 음성이 오고 가고
그렇게 씨름을 하는 동안 아침 업무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그 사원의 전화도 잠잠해졌다.
사연 인즉은
결혼에 실패한 적이 있고 48년째 혼자 벌어서 부친 병간호하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도중에 사치가 심한 여자를 잘못 만나 돈만 챙겨서 떠나버렸고 여자 때문에 진 빚까지 갚아야 하는 자기만의 고충이 있는 것은 웬만큼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평소에는 별로 말도 없다가 술만 먹으면 누군가를 잡고 시비를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정도~
당일은
연차를 사용한다고 계출계를 제출하고 출근을 하지 않았었는데 또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한 사원을 면담실로 호출하였다.
어찌 되었건 만취상태로 사무실로 전화를 하여 업무에 혼선을 초래한 것에 대한 사유도 알아야겠고 회사에 대한 불만이 무엇인지 들어도 보고 재발되지 않도록 따끔한 일침도 가할 겸.
멀쩡하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든 체 시선을 피하는 검은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이 경계의 신호를 보낸다.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며
"윤**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라고 묻자 뜻밖인 듯 곁눈질로 잠깐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한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뭐 쩝~"
"차 한잔 드세요 식기 전에"
호로록~조심스레 한 모금 하더니
한판 뜨자 할 줄 알았는데 아닌 듯 하니 경계를 풀며 입을 연다.
"회사에만 오면 땀이 나고 갱년기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그래서 그랬습니다."
"어제 이 과장이랑 통화하신 건 알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혹시 회사에 무슨 불만 같은 게 있으신가요? 예를 든다면 처우에 대한 불만이라든지 임금이라든지 아니면 업무처리가 불합리했다든지 회사에 전화를 해서 불만을 표시할 만큼의 뭔가는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것이든 하고 싶은 말씀을 있으면 다 해 보세요 나쁜 뜻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그런 게 아니고 회사와 상관없이 제 개인적인 부분입니다."
시선을 못 맞추며 고개를 숙이는 사원을 보니 혼쭐을 내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많이 힘들지요?"
"예~뭐 좀.."
"반백을 가까이 살아온 분이니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봅니다. 나 역시도 남이 모르는 고충을 갖고 있고 또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요? 다 좋아 보이는 그 사람들도 그 나름의 고통과 어려움을 갖고 산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행복하고 즐겁게만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다들 속으로 삭히고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거겠지요"
"......."
"시대가 급변하고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닥치기도 하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오늘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고 한 치 앞이 안 보이는데도 또 내일은 오고 말테니~
준비할 시간도 없이 또 맞닥뜨려지는 시간에 끌려가더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요?"
"......."
"혹시 밤에 잠은 잘 잡니까?"
"아니요 잠을 못 잡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표정과 충혈된 듯 부은 눈두덩이 그 고충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렇게 잠을 못 자고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하면 뭔가는 답이 찾아지던가요?"
"아니요"
"그렇지요? 내가 잠을 못 자고 고민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였으면 그건 문제도 아닌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차리리 걱정거리를 지워가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밤에는 작은 걱정이 자꾸만 깊어지고 커져서 그 무게감때문에 잠을 잘수 없는거지요 아침에 눈뜨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이었을뿐이고 또 반복되는 시간에 이끌려 일하고 좋든 싫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힘들고 싫고 지옥처럼 느껴지지요?
내 안에 화가 가득 차 있는데 뭔들 좋은 게 있을까요? 남탓으로 돌리면 화는 더 커지고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이고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심으로 걱정되는 맘으로 '형님 오늘 기분 어떻습니까?'하고 물어오더라도 내 기분이 엉망인 상태에서는 그사람의 진심을 받을 준비가 안되다 보니 좋게 들리지는 않을 거란 얘기지요 오히려 '이게 날 놀리나'라는 부정적인 판단의 오류에 빠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건 내가 나빠서도 아니고 내안에 화가 가득 차있다보니 나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워서 옆을 볼 겨를이 없기때문이지요 내가 화를 안고 있으면 해결책이 나오나요?
화를 키울것인지 긍정의 에너지를 키울것인지~
결국은 생각의 차이 아닐까요?
그럴 바에 차라리 잠도 푹 자고 긍정적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 해보자! 살아보자! 할 수 있다!
힘내자! 아자아자!"
"......"
"거짓말 같지만 그러면 진짜 에너지가 생깁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내 안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꽉 차면 표정도 밝아지고 실제 기분도 좋아집니다.
이건 내가 실제 체험했던 부분이거든요.|
40넘은 늦은 나이에 아는 것도 경험도 없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이력서를 내는 곳마다 거절당하고 식당에 그릇 씻고 써 빙하는 곳도 나이 많다고 안 받아 줍디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놨으나 내가 해보고 싶은 일자리에서는 일하러 오라는데 연락이 없고 이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지요 주야 교대근무에 난생처음 하는 공장일이 어떤 것 인지도 처음 여기 와서 알게 되었지요.
그때 난 그저 나를 일하게 해 준 이 회사가 너무너무 감사한 생각이었고 나이가 많아서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소외감과 떨어지는 자신감을 거울 앞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주문하면서 소심 해지는 나를 바로 세워나갔고 그 젊음에 뒤처지지 않으려 정말 두배 열심히 일 했었고 나를 채용해준 이 회사에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었지요 첫 월급날 음료수 한 박스를 사들고 사무실을 찾아가서 채용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더니 그때 그 이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회사가 생긴 이래 취직시켜줘서 감사하다고 음료수 사 들고 온 이는 처음이라고 호탕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는 표정이 꼭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결국은 나 자신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괜찮아지면 다 괜찮아집니다.
세상을 탓해도 누구를 탓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감당해야 할 부담만 커져서 나 스스로의 의지가 약해지고 소심해져 갈 뿐이지요."
"......."
"괜찮습니다.
지금도 괜찮습니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쓴 소주가 아니라 영화감상, 낚시, 운동, 등산 내가 좋아하는 하나를 찾아서 나에게 상도 주며 자신을 믿고 살아가 보십시다.
내가 나를 안 믿는데 누가 나를 믿고 따라 줄까요?
야~ 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잘해 온 거야~ 할 수 있어 괜찮아~"
"고인물을 비우면 새물이 채워집니다.
할수 있습니다.
나에게 토닥토닥 ~괜찮다 괜찮다~ 토닥토닥~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합니다 "
라며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걸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