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다

한돌의 시

by 신윤수

이곳은 미움도 사랑도 빛도 시간도 멈춘 블랙홀(black hole)이다 거기서도 여기는 한가운데 클라이맥스(climax)다 여기는 뭐든지 넙죽 잡아먹는다 누구도 어느것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클라이맥스가 총애하는 화이트홀(white hole)은 좀 다르다 우주에 에너지 순환을 위해 하나쯤 도망갈 곳은 있어야 하니까 블랙홀에도 화이트홀에 빠지거나 뫼비우스의 띠로 돌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이건 지구 속담인 ‘무어 구멍에 거시기 볼 날 있다’는 말과 같다 ‘사과의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뉴턴 아인슈타인의 사과, 애플의 베어먹은 사과도 그렇다 블랙홀에서는 영원히 그냥 있어야 한다 그런데 ‘늘 없는 아니 검은’인데 이건 너무 심심하잖아


그래서 여길 탈출하기로 하였다


블랙홀의 반대는 화이트볼(white ball), 하얀공이다 여길 벗어나려면 모든 걸 포맷해서 하얀공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하얀공 적으로 생각하고 하얀공 적으로 동작해야 한다 빛을 반사하면 들키니까 주의할 것 들숨만 쉬는 곳이 블랙홀인데, 이걸 뒤집어 날숨도 내야 한다 근데 너무 빠르면 다른 블랙홀에 빠지니까 조심할 것


탈출을 브리핑한다 모든 생각·판단을 클라이맥스가 모르게 가동하고 숨을 살살 쉬면서 클라이맥스 그림자 안에 숨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전략, 각개전투 요령과 은폐 엄폐 삼심육계 줄행랑이 필요하다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한다는 것과 검정놈들은 서로 먹으려 하는 검정들의 경쟁을 이용해라 그런데 도망치는 중에 저격수 블랙독(black dog)이 저격할 위험도 있으니 주의할 것


색깔을 자주 바꾸고 색 간섭도 이용한다 무지갯빛으로 하자 무지개는 색들이 서로 보완되고 서로 질투하니까 재밋다 그러다 지루하면 초록색으로 바꾸어라 초록은 생명의 빛깔이라고 우주가 공인한 색이다 그러다 배고프면 그림자를 만들고 빛을 끌어다 먹어라


다음은 가는 곳 정하기다 동서남북 위아래 앞뒤가 모두 의미가 없는 게 우주니까 어디든지 가도 되고 가다가 멈춰도 된다 정 모르겠으면 제비뽑기 같은 거로 정해라


지구라는 데가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헐었다더라


우주 시작 138억년인데 언제로 가지 빅뱅(big bang) 시절 카오스(chaos)로 갈까 여기저기 헤매다가 정할까 헤매로스(hemeros)로 갈까 이번에 만든 말이다 중앙통제장치(CPU) 성능은 어쩌지 아메바 지렁이 강아지 고래 비행기 슈퍼컴퓨터 중에서 골라보자 글쎄 사람이 어떨까 싶다 원래 사람은 슈퍼컴퓨터보다 우수한 존재라고 한다


이렇게 무지개색 초록색으로 바꿔가며 어찌어찌 탈출했는데 지구에서는 이걸 오르트(oort) 구름에서 생기는 화살별 혜성, 꼬부랑 글씨로는 코멧(comet)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 요즈음 정치가 우울해서 2017년에 써 둔 글을 고쳐 탈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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