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은 역사·지정학으로 살펴보는 통일론의 마지막 부분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2+4=1이다.
1. 남한과 북한은 동서독처럼 평화롭게 통일할 수 있다.
2.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는 우리의 분단에 책임이 있고, 도와줄 의무가 있다.
3. 남북 평화와 통일은 동아시아와 세계평화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먼저 독일역사와 한반도 문제에 관한 글을 인용하려 한다. 독일에 관하여 생소한 개념 몇 개도 정리해 보았다. 글이 길어져 두 번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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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일현대사』 12장 결론 부분 (783~793쪽)
* 디트릭 올로 지음, 문수현 옮김, 미지북스, 2019년
독일인이 그들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게하르트 슈로더는 독일인은 1945년 이후 그들의 민주적 성취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만 한다고 답했다. (785쪽)
확실히 근현대 독일사는 유럽과 세계의 역사에 불균형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근대 독일사 대부분은 ‘독일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785쪽)
제3제국은 근대화에 이르는 독일의 비대칭적 경로의 정점이면서 가장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로 복귀할 의사가 없었다. 독재자의 목표는 전면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787~788쪽)
2차대전 말에 독일의 통일은 파괴되었고, 독일은 30년 전쟁 이후 전례 없는 규모의 물리적 파괴를 경험했다. 600만 명 정도의 독일인이 사망했고, 1,2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1918년 독일은 영토의 13%를 잃었다. 1945년에는 1871년 독일 영토였던 것의 무려 1/3을 잃었다. (788쪽)
엘베강의 동쪽과 서쪽에서 독일인들은 1945년 이전 독일사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를 원했고, ‘0시’에서 다시 새로 시작하고자 했다. 실패한 독일사의 과거가 아니라 ‘타자’, 즉 승리한 연합국, 특히 두 강대국인 미국과 소비에트의 가치들에 근거하여 새롭게 출발하기 위한 가치 토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다. (789쪽)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결정론이라는 구속을 동독에 부과하려고 고집했던 반면, 서독의 개방적 다원주의 사회는, 지속적인 국가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과거의 총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서독에서 ‘다른’ 독일의 요소들 자유주의, 다원주의, 민주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 은 해방되었고, 마침내 독일 사회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789쪽)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분단국가는 국제관계에서 특수한 패권적 길에 대한 갈망을 버렸고, 초국가적 권력 블록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서독은 나토와 유럽연합에, 동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에 가입했다. (790쪽)
갑작스럽게 독일통일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두 국가 간 물리적 장벽이 붕괴했을 때 두 독일인이 한데 보이는 눈물겨운 장면들은 결국 하나의 독일인이 있음은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1990년 3월 선거에서 승자는 신속한 통일을 가져올 것을 약속한 정당들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자 했던 동북 부흥파들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790쪽)
1990년 여름 동안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다른 사건을 뒤쫓는 형국이었다. 7월 초 동서독은 경제동맹과 통화동맹에 합의했다. 같은 달 헬무트 콜 총리는 뛰어난 개인적 외교력을 보여주며 당시 소비에트의 지도자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설득해서 나토와 유럽연합의 구성원으로 남을 정치적으로 통일된 독일이 소비에트에 위협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했다. (791쪽)
극적인 몇 달 동안 콜 정부는 부시 행정부와 긴밀히 협력해서 일했다. 프랑스, 영국과 달리 미국은 통일독일이 나토와 유럽연합의 구성원으로 남는다는 전제하에 독일의 재통일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791쪽)
1871년 독일은 무력으로 통일되었고, 새로운 국가는 세계적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유럽 대륙의 심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1990년 통일은 평화로운 과정이었고, 새로운 국가는 나머지 서유럽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주권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은 더구나 아니었다. 유럽연합에 통합된 가운데, 독일과 그 파트너들은 다수의 중요한 권리를 브뤼셀의 유럽위원회와 슈트라스부르크의 유럽의회에 이미 넘긴 상태였다. 영토적 차원과 군사적 기량의 측면에서 2001년의 독일은 1871년의 독일보다 훨씬 작다. 통일독일의 연방군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 전에 가졌던 병사 수의 절반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791~7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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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일과 한국의 통일여건 비교
독일과 한국은 어떻게 다른가? 전쟁에서 패배한 (전범국) 독일이 통일되었는데, 일제의 식민지였다가 외세에 의해 분단된 한국은 아직껏 통일은커녕 분단된 남과 북이 서로 주적 운운하는 전쟁상태에 있을까?
여기에 경험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텐데, 우선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미관계에 관한 책『한미동맹 70년 한미역사 140년』의 글을 인용한다. (김열수, 법문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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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은 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았으며, 동독이 서독을 적화하려 하거나 대규모 침투나 도발을 통하여 정치·군사적 긴장관계를 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동독의 서기장들이 수십년 동안 장기 집권한 적도 없고 또 대(代)를 이어 집권한 때도 없어, 권력을 공고화하거나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동독 주민들을 적절히 긴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서독 또한 장기 집권을 위한 도구로써 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동독과의 긴장관계를 형성하거나 ‘동풍’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독일의 국토분단과 국가분단은 진영의 책임세력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분단을 창조하지는 않았다. 내전을 회피한 동서독 간의 갈등은 한반도와 비교해 볼 때 미미한 것이었다. 오히려 독일은 강요된 분단을 민족적 협력으로 극복하고자 했고, 탈냉전으로 인해 강대국들에 의한 족쇄가 풀리자 내재된 민족의 역량으로 통일을 달성했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시발 책임은 강대국에게 있으나 이를 공고화하고 심화시킨 책임은 한반도에 있다. 따라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 사이에 형성된 냉전의 공고화와 심화된 부분을 남북 스스로가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만들어야 하며, 종국적으로는 강대국들의 협조과정을 거쳐 분단 시발 이전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한반도 냉전과정이 밖에서 안으로 진행되었다면 이의 해체 과정은 안에서 밖으로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 320~321쪽에서)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려면 한반도 분단구조가 극복되어야 한다. 먼저 민족적·사회적 분단이 극복되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가분단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토분단이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분단이 평화적으로 극복되려면 정전체제가 잘 유지되는 가운데 점차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주한미군은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이 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장하는 세력으로 남아야 하며 심지어 통일이 되고 난 후에도 지역의 안정을 위해 미군은 한국에 주둔할 필요가 있다.
---평화체제가 구축되더라도 유엔군사령부는 한반도 내에서 평화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거나 새로운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하는 등 기능전환의 방식을 통해 계속 잔류할 수도 있다. 독일도 주독미군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통일되었으며 독일 통일 이후 유럽은 안보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 평화롭고 번영된 유럽의 집(OSCE, EU)을 지었다. 유엔군사령부도 한반도 통일의 버팀목과 평화와 번영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45~346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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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단국가와 현재 모습
2차대전 후 분단국들의 통일과정을 살펴보자.
오스트리아(1955년 통일), 베트남(1975년 통일), 독일(1990년 통일), 남북한(79년째 분단, 아직도 전쟁 상태)을 비교해 보려 한다.
오스트리아는 1945년 미영불소 4개국이 수도 비엔나(Wien, Vienna)와 다른 지역을 4구역으로 분할 점령하였다. (10년 후) 1955년에 독일과 영원히 합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 통일 조건에 중립국은 없었는데, 오스트리아 의회가 그해 말 영세중립국을 선언하여 현재에 이른다.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회의(인도차이나에 관한 9개국 회의) 결과 북위 17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에 개입을 하다가 1965년부터 무력 개입 후 1973년에 철수하였다. 그 후 2년만인 1975년에 북베트남이 전체를 공산통일하였다.
독일은 1945년 미영불소 4개국이 수도 베를린(Berlin)과 다른 지역을 4구역으로 분할점령하였다. 1947년 먼저 미영 2개 지역 통합, 다음 1949년 미영불 3개 지역 통합으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만들어지고 소련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들어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동독의 5개 주가 자유선거 후 독일기본법(서독 헌법)에 따라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흡수통일되었다.
남북한은 1945년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하고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북위 38도선으로 분단되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동족상잔의 내전이자 국제전인 한국전쟁을 치르고나서 전쟁상태(휴전 중)이며 79년째 분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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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은 누구인가?
미국은 2차대전에서 싸운 전범국 일본과 독일 편을 들었고, 지금도 우선순위는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1950년 1월 한국과 대만은 포기하지만 일본은 지킨다고 하였다(애치슨 선언).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2차대전 후 처음에는 유럽을 떠나려 하다가 마샬플랜으로 유럽재건에 나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NATO 결성과 함께 유럽지역 잔류를 결정한다. 이때를 계기로 서독군과 일본자위대 창설을 허용한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같이 싸운 혈맹이고, 한국의 동맹국이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일본의 방파제 또는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용되는 존재에 불과할지 모른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북한의 핵문제는 북한과 이란, 이라크 등을 ‘악의 축’으로 몰았고, 북핵이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의 명분을 제공하니까 핵폐기 자체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미국 핵물리학자 시그프리드 헤커『핵의 변곡점』를 보면 결정적 계기마다 미국이 협상을 망가뜨렸다고 한다.
미국은 지금도 新애치슨 선언을 할 수 있다. 미중의 패권경쟁에서 중국을 봉쇄하는 데 있어 일본 등으로 충분하다면 미국은 번거로운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운운이 바로 이걸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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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독일의 0시(1945년)
독일에는 0시(1945년)라는 말이 있다. 2차 대전 후 독일인들의 변화해 온 개념이다. 위키백과 등에서 독일의 0시는 독일이 패전한 1945년 5월 8일 0시를 의미하는데, 독일은 그때를 계기로 완전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0시(독일어:Stunde Null, pronounced [ˈʃtʊndə nʊl])는 1945년 5월 8일 0시를 의미하는 단어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끝과 동시에 새로운 독일의 시작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과거와의 절대적 단절과 급진적인 새로운 시작" 또는 "낡은 전통과 관습의 싹쓸이"를 의미한다.
1950년대 이후 독일에서는 '0시' 개념이 일반화되었는데,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독일의 물질적·도덕적 단절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먼저 연합군 중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연합군과 소련의 독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다. 서방 연합군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였지만, 소련은 이것을 집단주의·권위주의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서방 연합군의 민주주의의 정의는 "개인의 정치참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소련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고 계급이 없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추진되는 체제"로 민주주의를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0시라는 개념은 전쟁 이후 독일 정치에도 등장하였다. 영국 외교관 로버트 길버트 반시타르트는 독일인들에게 "황폐하고 존재하지 않은"이라는 생각이 있다면서 "독일인들이 자신의 생각이 있다면 독일인들의 (새로운) 사상으로 채워야 하는 새로운 독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전쟁 이후 독일과 재협상을 시도하는 여러 외교관도 0시의 개념을 인정하면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있기를 원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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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독일과 같은 ‘0시’가 없었다. 서독은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가 어울려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난 ‘라인강의 기적’을 보였는데, 한국은 (유사) 민주주의와 (독점) 자본주의, 반공주의와 군사독재가 198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중에도 ‘한강의 기적’이 있은 것은 천시지리(天時地利)의 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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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독일문제(Deusche Frage)와 한반도문제
우리와 독일이 다른 점은 동서독은 서로 전쟁한 적이 없고, 독일의 동방정책은 성공했지만, 우리의 북방정책은 성공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 분단과 동서독 갈등은 늘 독일문제(Deusche Frage)라고 불리었다. 왜냐하면 유럽 중앙에 자리한 분단 독일이 유럽 통합의 큰 애로였지만, 통일 독일은 유럽 평화와 안전을 위협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통일에는 늘 대독일주의(Großdeutsche Lösung)와 소독일주의(Kleindeutsche Lösung)가 대립되어 있었다. 대(大)독일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과 영토를 통합하는 것이고, 소(小)독일은 북 독일쪽(오스트리아를 뺀)만 통합하자는 것이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대독일주의였지만, 패전 후 통일(재통일)된 1990년의 통일은 소독일주의에 그친다. 미영불소 4개국은 1955년에 있은 오스트리아의 통일에 독일과 영원히 통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한다.
우리는 과거 1천년 이상 고려(918~1392)부터 조선(1392~1910), 일제 식민지(1910~1945)까지 하나의 민족, 언어, 통일된 영토에서 살아온 평화애호 국가였다. 그러다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고는 현재도 평화와 통일은커녕 서로 전쟁을 운운하니 이걸 어쩌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