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맑음
투둑투둑 밤이슬, 부스럭부스럭 고양이, 탁탁 탁탁 텐트 덮개. 곤히 든 잠을 깨웠다. 아직 열두 시 반, 아내와 아이가 든 방은 고요하고 하늘은 여전히 맑은 듯 아까보다 별이 더 환했다. 다시 누웠으나 이내 허리는 배기고 서늘한 기운에 이불을 당겼다. 서너 번 자다 깨니 날이 밝았다. 해 질 녘만큼 아름다운 아침, 물감으로 치면 고흐가 자주 쓰던 밝은 노란색이었다.
오늘 예정은 신수도, 사천 신수도차도선여객터미널에서 배로 십오 분쯤 떨어진 사천시에서 가장 큰 유인도이다. 다른 볼 것은 크게 없으나 산책길이 아름답다는 말에 가려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내일까지 모든 일정은 보류되었다.
아내와 제일 가까운 친구 아버지 부고 소식이었다. 남해 여행을 계획하며 함께 보내자 가장 먼저 제의했던 가족. 그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서울 돌아가서야 만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여름휴가철마다 같이 보낸 인연이 올해도 이어진 듯했다. 빈소는 지난해 아내 아버지를 떠나보낸 장례식장. 더 마음이 쓰였다. “어떻게 하고 싶어?” 발인을 본다면 내일 갔다 모레 돌아온다. 금요일만 남는 셈. 어쩌면 여행은 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내는 바로 가자고 말했다. 왕복 칠백킬로미터, 예상 못한 먼 거리 이동이지만 시간이 넉넉해서 다행이다. 내일 돌아오면 아직 삼 일이 있다.
아내는 친구를 안고 잠시 흐느꼈다. “왜 얘기하지 않았어.” 그녀는 휴가를 방해할까 가장 의지하는 친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부고는 다른 사람을 통해 받았다) 빈소를 가며 어찌해야 하는지 묻는 아내에게 아는 사람 모두한테 알려주라고 했었다. 오랫동안 교류가 없어서, 그들 경조사를 챙기지 못해서, 시간 뺐을까 미안해서. 그렇게 자신과 상대방을 가르다가 점점 멀어지는 게 안타까워 낸 답변이었다. 그녀의 딸 예니가 말했다. “이모부 아까보다 사람이 많아졌어. 할아버지가 환영받는 느낌이야.” 조문과 추도는 현생과 이별한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지.
※ 장례식장 가며 연락에 바빴던 아내는 돌아오는 길 고마워했다.
아내는 친구를 위로하고, 아이는 누나 곁에서 평소처럼, 난 바쁜 상주를 대신해 손님 안내하며 각자 역할대로 장례식에 참여했다. 조문객이 거의 돌아간 밤, 하루 묵으려 어머님 집으로 가던 중 작년 아버님 상이 떠올랐다.
< 2023.12.12.부터 제천 아버님을 기린 삼 일 그리고 한참 후 >
매년 12월 12일은 많은 사람 뇌리에 선명한 날, 2023년 그날은 나와 아내에게 의미가 더 커졌다. 아내의 아버지, 장인이 돌아가셨다.
아내가 아들 야니를 뱄을 무렵 아버님은 의외의 진단을 받았다. 육십삼 세, 이른 나이 찾아온 치매였다. 조발성은 노인성보다 진행 속도가 빨라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갔다. 지각 표면에서 내핵에 이르는 순서처럼 함께한 시간이 짧았던 사람부터 오래된 가족까지 망각은 집요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마 당신이 기억했던 마지막은 어머님이었던 듯했다. 기억 상실과 더불어 찾아뵐 때마다 외견 또한 작아지셨다. 큰 체구는 아니었으나 단단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부리부리한 눈매는 오랜 기간 독한 약에 천천히 누그러졌다. 일 년 전에는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아내로부터 여러 차례 부재중 전화가 남겨졌다. 전날 무리한 회식에 멍멍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오전을 허비하느라 받지 못했다. ‘내 걱정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였을까.’ 힘겹게 받은 전화기 너머 아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돌아가셨어.” 조금쯤은 더 사실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온몸의 피가 여러 번 빠르게 돈 느낌과 함께 정신이 맑아졌다. “바로 갈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과 이별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안타까움과 다행이란 서로 맞지 않는 감정이 번갈아 지나갔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친분 있는 몇 사람을 마주쳤다. 자세한 설명을 할 겨를 없이 약간 목이 메어 말했다. “장인이 돌아가셨네.” 그동안 아버님 상태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어 듣는 사람 모두 의아해했다. 하지만 지난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해야 하지?’ 한편 아내가 걱정되었다.
집에서 가방을 꾸리는 사이 아내가 학교에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차에 올라 어머님에게서 전화로 그간의 사정을 듣고 내려가는 길,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으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버님은 오십 년대 초 영월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 밑에서 커 여러 면이 결핍되었다. 생활력은 강했으나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었기에 고집 세고 이해심이 부족했다. 경제적으로 점차 어려움이 없어졌지만,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아내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남동생 있는 둘째 딸인 탓에 바라는 만큼 사랑이 채워지지 않았다. 공감 잘하는 성격에 때때로 감정 손실이 더 컸고, 고등학생 감수성이 꽃핀 나이 아버지 외도에 충격도 받았다. 학교나 사회 친구들과 관계에서 많이 극복했으나 아버지와 가까워질 기회는 얻지 못했다. 치매 병증 예후가 좋지 않은 데다 폭력성까지 있어 돌아가시기 전 칠 년 가까이 오롯이 어머님이 수발했기에 원망은 오히려 커졌다.
오랜 어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내와 다른 식구들은 담담했다. 오히려 그동안 어머님의 힘들었던 시간을 위로하며 따뜻한 말을 건넸다. 조카와 아들 역시 슬픔 없이 해맑았다. 넓은 장례식장은 뛰기 좋은 놀이터였고, 처음 겪는 조문객을 향한 답례 인사는 재미난 놀이였다. 나 역시 편안히 지인들을 맞이하여 이야기 나누는 때 예상하지 못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들 야니였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 앞에 어른들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울어?” 소란스레 빈소 안을 뛰어 종종 혼이 난 아이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펐어. 눈물이 나와.” 십여 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보이던 아이는 다시 평온해졌으나 오열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오랫동안 많은 슬픔을 겪어 가뭄에 강바닥을 드러낸 듯한 어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 전해 져서였다. 가장 처음 혈육을 잃은 아들은 칠 년 힘든 시간과는 관계없이 떠난 할아버지만을 생각했다. 차분해진 아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빠 몫까지 슬퍼해 줘서 고마워.”
아버님의 마지막 얼굴은 평온했다. 심장이 정지된 후에도 까슬까슬하게 계속 자란 수염은 결혼식 앞둔 새신랑처럼 면도크림을 발라 산뜻하게 깎아냈다. 다 세지 않은 머리 역시 포마드 기름으로 깨끗하게 정리했다. 앙상한 팔과 다리는 종이로 감싸 넉넉한 수의를 입혔다. 염하는 모습을 보며 가족들은 또 한 번 슬퍼했고 아들 역시 눈이 퉁퉁 부었다. 이별은 함께한 시간만큼 힘들었다.
둘째 날 밤, 몇몇 친지와 친구만 남아 날을 새다시피 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화장터로 갔다. 한 시간을 기다려 창 너머 화구로 시신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 문이 닫히면 이승과 영원한 이별. 천천히 굳게 닫히는 차가운 쇠문이 비로소 안식으로 가는 입구라는 사실에 아이러니했다. 또 한 시간 반이 흐르고 대기실 화면에 한 글귀가 떴다. “수골 중.” 아버님은 작은 여러 뼛조각으로 남았다. 기계 망치로 곱게 빻아 흰 종이에 담긴 채 작은 상자에 넣어질 때 가족들은 다시 한번 서럽게 울었다. 애도, 힘들었던 시간, 아니면 마지막이란 안타까움. 아마 모든 감정이 두서없이 섞였기 때문인 듯했다. 슬픔을 대한 마음 모른 아이가 곁에서 재잘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디로 가?” 그동안 마지막을 여러 번 봐왔기에 궁금할 만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여러 번 눈물 뒤에 진정된 아이는 호기심만 충족되면 그걸로 만족했다. 열 시 남짓 마치고 어머님과 막내 남동생은 선산에 유해를 모시러 갔다. 나머지 가족은 집으로 돌아와 서너 시간 정신없이 잠들었다.
장례식 시작부터 발인까지 난 아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인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으려 한 것과 아버지 임종 전과 후 상반된 모습에서였다.
난 부고는 돌아가신 분과 지인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아내는 알림으로 인해 부끄러운 면이 드러난다고 느낀 것 같았다. 감정 단절과 외도로 인한 상처, 오랜 투병, 아버님의 공감할 수 없는 삶과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한 게 아니었을까. 더욱이 마지막 이삼 년, 주변과 단절되어 홀로 버텼던 어머님의 큰 고통 역시 여러 차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어머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른 임종이 불행한 일만은 아니었다. 아내 역시 같은 마음이라 여겼다. 하지만 육친과 사별 후에 안정을 찾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했다. 아내는 인내심이 말라버린 듯 신경질적인 데다 감정 기복이 커졌고 때때로 아버지와 회복하지 못한 관계를 자책했다.
장례 후 가까운 사람들을 만났다. 조문에 대한 답례를 빌어 그간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상당 기간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것.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묵묵히 바라보는 마음을 가질 때란다.
몇 달 지나 아버님과 이별한 날이 떠올랐다. 오전 발인은 겨울 같지 않게 따뜻했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오후에야 다시 영하로 내려갔다. 당신이 가족들의 불편을 줄여주려 베푼 마지막 은혜로 여겨졌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아무 걱정 없길 바랄게요. 남은 가족들과 항상 행복하게 살겠습니다.”